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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권 Oct 13. 2021

'버림받음'이란

버림받는다는 것은 아픔이란 단어의 결정체입니다. 관계의 형성에서 전해오는 삶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인간일수록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여기에서 버림받는 건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거나, 관계의 완벽함을 자랑하던 타인으로부터 버림받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버림받았을 때, 그때가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작은 섬마을에 관광객인 넘치는 시기는 여름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갈 무렵이면 그 섬에는 집 잃은 강아지가 그렇게 많다고 해요. 도시에서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왔지만, 돌보는 게 어려워서 그랬는지 강아지만 그 섬에 남겨놓고 떠나버리는 가족이 한 둘이 아닙니다. 섬에 휴가 온 사람들이 버리고 간 유기견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문도 모른 채 한때 자신을 사랑해줬던 그 누군가에 의해서 버려진 사실을 과연 모르고 있을가요.


한 아이는 태어난 지 1개월 도 안돼서 이름도 모르는 건물 앞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졌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친모로부터. 가장 사랑받아야 할 갓 태어난 아이가 그렇게 버려질 때 아무런 감정이 없었을 까요. 아닙니다. 인간은 시신경이 발달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처해져 있는 상황을 육감으로 알아차리는 동물적 감각이 없는 건 아닙니다.


조금 더 자란 어떤 아이는, 부모님의 이혼으로부터 자신은 하나의 짐덩어리가 되어버리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육원에 맡겨지는데, 그때 아이가 느끼는 감정의 첫 번째는 '나를 버렸어'라고 합니다. 사랑받고 자라기에도 부족한 아이는 버림받은 기분을 몸소 체험하며 세사의 험악함을 배우며 성장해버립니다. 성장한 아이는 자신만의 사랑을 찾게 되면서 자신의 모든 걸 바쳐 사랑하기도 합니다.


고무신, 군화를 거꾸로 신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군대 간 사이에 떠나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게도 잊히지 않는 고통의 시간을 선사한 그녀가 있습니다. 그녀는 도곡동의 내로라하는 집안의 둘째 딸이었습니다. 충분히 부유했고, 아버지는 세상이 다 아는 기업의 높은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둘은 첫 만남부터 설레며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죠. 그런데 군대가 둘 사이를 갈라 노았습니다.


Photo by@paris_shin / 한상권


그때나 지금이나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외부의 힘에 의해 사람과의 관계 또는 신체적 접촉을 멀리해야만 하는 상황은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힘든 훈련을 마치고 100일 만에 첫 휴가를 받아 그녀와 자주 가던 카페 깊숙한 곳에 자리한 우리만의 자리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습니다. 얼마 후 도착한 그녀의 모습에서 약간의 자연스럽지 못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언제나 매달고 다니던 내가 선물했던 열쇠고리는 그녀의 가방에서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나 그 오빠 다시 만나기로 했어'라고 말하는 그녀의 한 마디는 나를 죽음과 같은 어두움의 시간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렇게 사랑으로부터 버림받으며 구멍 난 가슴을 부여잡고 한없이 울었던 시간은 아련하기만 합니다. '잘 되었다' 그리고 '나보다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누구든 상관 없어'라고 나를 안정시키려 애쓰지만 쏟아지는 눈물은 막을 길이 없습니다.


김이나 작사가는 2007년 왕가위 감독의 작품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 나오는 장면을 기억했습니다. 영업이 끝난 카페에서 여자는 실연당한 이유를 찾고 있었습니다. 남자의 위로에 여자는 말합니다.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어요. 이 파이만 해도 그렇죠. 매일 밤 치즈케이크와 애플파이는 다 팔리고 없지만, 이 블루베리파이는 고스란히 남아 있잖아요." 여자의 말에 남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블루베리파이는 잘못이 없어요. 사람들이 그냥 선택하지 않은 것뿐인데 파이를 탓하면 안되죠. 헤어짐이라는 건 꼭 누구의 잘못 때문에 일어나는 건 아니죠. 그냥 마음이 끝났을 뿐인데."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버림받음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게 선택의 외민일지라도 그것은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연인, 그리고 친구로부터, 때로는 내가 몸담은 조직으로부터도 버림받지만 이 모든 것의 결과물은 비슷합니다. 더 이상 버림받지 않겠어. 그리고 상처 받지 않겠어. 그렇게 되뇌며 사람과의 관계는 조금 더 치밀해지고,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듯이 조금 더 조심스럽습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내가 차갑다고 수군거리며 또 한 번 나를 흔들어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더 이상 버림받지 않고 싶다는 겁니다.


그 아픈 것을, 그 슬픈 관계의 흔들림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정말 버림받는 것은 아픔의 결정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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