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cribblie Nov 11. 2021

푸른 목숨, 플랜더 필드의 붉은 꽃이 되어.

절대로 잊지 않는 영국인들(1) -알쏭달쏭 영국문화

어떻게 시작을 할까.
11월 11일 11시니까, "영국, 빼빼로데이 11시에는"같은 낚는 제목을 붙여볼까? 아니, 그러고 싶지 않다.
처음 영국에 갔을 때, 붉은 꽃에 한 중앙에 큰 검은 점이 있는 붉은 꽃을 붙여놓은 차들을 만나며, "강아지들이 색맹이니 차에 치이지 말라고 저런 걸 붙이나?"같은 남편의 엉뚱한 추측으로 시작해볼까? 아니다, 그것도 영 아니다.


 그해 11월이 되어서야 그 정체를 알게 되었다. 이 배움 또한 아이 학교를 통해서였다. 1파운드로 양귀비(Poppy)를 살 수 있다고 학부모 메일이 왔다.

 대뜸 왜 1파운드를 내고 조화 양귀비꽃을 사라는 건지
The Royal British Legion Poppy Appeal이라는 단체는 또 무엇인지.


그 맘때 아이는 Gary Barlow & The common wealth의 Sing이라는 노래를 학교에서 배워왔고, 끊임없이 듣기 시작했다.

Gary Barlow & The common wealth의 Sing


Some words they can't be spoken, only sung
So hear more thousand voices shouting love
There's a place, there's a time in this life
When you sing what you are feeling
Find your feet, stand your ground
Don't you see right now
The world is listening to what we say

Sing it louder, sing it clearer     
Knowing everyone will hear you   
Make some noise, find your voice tonight    
Sing it stronger, sing together    
Make this moment last forever    
Old and young, shouting love tonight


 오늘은 일명 Poppy Day 그러니까 양귀비날이라고 불뤼는 Remeberance  Day이다. 1918년 11월 11일 1차 대전 종전 선언했던 무구한 젊은 생명을 기리는 날이다. 우리나라의 현충일 같은 날인데, 우리는 얼마나 현충일을 기억하며 지낼까, 영국인들은 작은 양귀비 조화를 파는 것으로 100년 넘도록 잊지도 않고 이렇게 끊임없이 되뇌이나보다.

 Poppy의 기원은 캐나다 의사가 지은 시에서 시작되었다. The Flander field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시는 젊은 군인들의 전장에서의 두려움과 의미, 죽어서도 지켜지길 바라는 믿음을 노래하고 있다. 그 마지막에 푸른 젊음이 붉은 피가 되어 져버린 들판에 가득 핀 양귀비의 붉은 물결로 끝이 난다. 시 말미의 Poppy, 강렬한 시각적 심상인 붉은 Poppy가 바로 그 Poppy의 시작인 것이었다. 세계 1차 대전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군부대에서 사용되어 왔는데 처음은 미국부대에서 사용하였지만 지금은 주로 영국에서 사용하고 캐나다나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서 사용한다고 한다.


 마침 영국에 도착했던 해는 1918년으로부터 딱 100년이 흐른 2018년이었다. 동네 도서관 게시판에도 세계 1차 대전 종전 100년이 되는 해라고 킹스턴 도서관에서는 관련 책 행사를 열기도 했다.

도서관 게시판과 마을 광장이라면 하나씩 자리잡고 있는 전쟁기념비

우린 아주 가까운 것조차도 쉽게 다 잊고 사는데...

세계 1차 대전 늘 평화롭게 잘 살던 대영제국에겐 귀하게 자란 양반집 아드님이 갑자기 세파에 내몰린 듯한 겸험이어서 그랬을까? 세계 1차 대전이 영국에서는 어떤 분기점 같은 것이라서 그런 것일까? 전쟁으로 세상과 산업의 구조는 바뀌어갔다. 공고한 귀족사회가 붕괴되기 시작했고 워커 계급 중에는 전쟁통에 돈을 많이 번 부르주아가 생겼다. 계급에 순종하고 살던 평민들도 노력으로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고 My Lord의 지배에서 벗어나 전장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도시로 돈과 직업을 찾아 떠났던 것이 1차 대전이었다.

종종 세계 1차 대전에 대해 영국인들은 멜랑꼴리 같은 걸 갖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6.25든 해방이든 처절하기만 한 것 같은데 말이다. 농담 삼아 남편이랑 하는 말이 있다. 잘살던 나라라 잠깐 입은 상처는 슬픈 낭만일까? 힘없이 삐쩍 마른 놈은 한 대 맞으면 뼛속까지 아프지만.


<표지그림 출처 : University of Toronto>

이전 12화 홈리스에게 받은 도움 in Londo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