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하는 것"의 힘
<자존감 수업>의 저자 윤홍균 교수가 말한 글을 잘 쓰는 방법은 "잘 쓰려고 하지 말고 그냥 많이 쓰기"였다. 이렇듯 삶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건 어떤 일을 하건 간에 '그냥 하는 것'의 힘은 그야말로 막강하다.
몇 년간 꽤 많은 밤을 불안 속에서 뒤척였었던 적이 있다. 물론 사소한 것 하나에도 심각해지는 건 지금도 여전하지만 그 몇 년의 시간은 말 그대로 어두움이었다. 사람들 틈에 섞일 때면 마치 서재에 나와 잠깐 손님을 맞이하는 사람처럼 웃고 집중하다가도 이내 혼자 남을 때면 늘 한결같이 마음이 메말라있었다.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길을 걸어야 '이 길이 맞네.'하고 안도할 수 있을지 알고 싶었고 그래서 괴로웠다. 삶 속에서 특별히 결정적인 사건을 겪지 않는다하더라도 이러한 불안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생각한다.
몇 해 전 여름밤에 큰 교통사고를 겪었다. 자정을 넘길 때 즈음 택시를 탔는데 할증이 붙기도 했고 평일이라 도로에 차도 없어서 속도가 무척 빨랐다. '5분이면 도착하겠네'라고 생각했었지만 그 잠깐의 교통사고로 인해 나는 한 달 넘게 집에 가지 못했다. 큰 사거리 길에 한 승용차가 놀랍게도 가로로 길을 막고 서 있었고 내가 탄 차량은 속도를 줄이지 못해 그대로 충돌하고 말았다. 그 충격이 굉장했어서 차는 몇 바퀴 회전을 하다가 근처 신호등을 들이박고 이내 불이 났다.
난 부딪히는 그 순간을 통해서 사람이 급작스러운 충격과 위험 앞에서는 의외로 덤덤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분명 창가 너머로 흰 소나타가 보였고 위험을 감지한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는데 머리로는 '설마 부딪히겠어'라는 작위적인 안도를 했던 것이다. 사람은 생각보다 대담한 존재다. 그렇게 사고가 났고 뭔가 이상함을 느껴 입술을 매만졌을 때 윗입술은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나중에서야 입술이 너무 심하게 찢어져서 위로 말려 올라간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입술이 떨어졌다고 생각했고 절망했다. 그래서 그 와중에 엄마에게 "나 입술 떨어졌어."라며 전화기를 붙들고 통곡했다. 119가 도착했을 때도 "입술이 떨어지셨군요."라는 진단을 받을까 두려워서 (실제로 떨어져도 그렇게는 이야기 안 하실 테지만) 다친 부위 좀 보여달라는 구조대원의 간곡한 부탁에도 손으로 입을 감싸고 보여주질 못했다. 다행히 치료는 잘 마무리가 되었고 전치 5주 진단을 받아 입원을 했었다.
왜 나였을까?
이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던 건 사고 난 직후는 아니었다. 오히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는데 결정적인 계기는 '외상 후 스트레스'를 겪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외상 후 스트레스는 유해가스가 몸에 스며드는 것과 비슷해서 형체는 보이지 않지만 타격이 크다. 사람마다 증상도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만성두통을 겪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근육통으로 10년 뒤에 찾아오기도 한다고 했다.
내게 있던 증상은 불안이었다. 내가 사고 났던 장소와 비슷한 사거리길을 갈 때 심장이 쿵쾅 거리는 것은 그나마 자각할 수 있었다. 가장 괴로웠던 건 사소한 데에서 이상하리만큼 화가 벌컥 나고 작은 실수에도 내 탓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상황과 운 탓일 수도 있고, 설령 내 불찰이었다 하더라도 "잘해야지."로 넘길 수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도 마음이 허락해주질 않았다.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의심이란 그저 가까운 친구나 동료 혹은 애인에게 품는 묘연한 감정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도 얼마든지 품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흔히 이야기하는 나를 믿는 믿음, 자존감이 와르르 무너지는 과정이었다. 물론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날의 사고는 수면 위에 올라왔던 계기였을 뿐 스스로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과 자기 검열은 늘 마음 저 이면에 있었던 것 같다. 그저 '외상 후 스트레스'라는 과학적 진단에 의존해 이 내밀한 정신적 흐름을 대놓고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이후로 불안에 대해 고민하고 여러 방법을 시도하기도 했다. 다른 것보다도 반복되는 나 자신에 대한 스트레스와 '왜 나야.' 혹은 '나에게만 불합리해.' 등의 말버릇은 나뿐 아니라 주변까지도 지치게 만들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그러나 조급함은 완벽한 해결책이 되어주지 못했고 시간은 아주 더디게 흘러갔다.
항상 내가 옳기만을 바랄 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틀렸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우리는 항상 틀리기 때문이다. 틀리면 변화할 수 있다. 틀리면 성장할 수 있다. 여기 묘한 진리가 있다. 사실 우리는 어떤 경험이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 그 순간에는 모른다는 점이다. 때로는 인생에서 가장 힘겹고 스트레스가 심했던 순간이 결국 인생을 결정짓고 동기를 부여하는 순간이 된다.
마크 맨슨 <신경 끄기의 기술> 중
그리고 아주 천천히, 삶 속의 과정 속에서 마음의 상처나 아픈 찌끼를 어떻게 보듬어야 하는지를 조금씩 알아갔다. 그 가운데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너무 깊은 관심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우리가 어디선가 쓸려 손가락에 피가 나면 붕대 감을 생각을 먼저 하지 "왜 베인 거지?", "베이지 않을 방법은 없었을까?"따위의 상념에 깊게 젖지는 않는다. 마찬가지이다. 내면의 상처도 이미 어떤 계기로 마음이 괴롭고 불안하다면 그 순간부턴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이라는 걸 배웠다. 마음에 천천히 붕대를 감고 그 상처를 위로해주듯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행위가 더딘 것 같지만 어느 때엔 가장 빠른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조이는 자신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모든 일에 다 이유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때는 세상 속에서 허우적대며 눈 앞의 일들을 헤쳐나가기도 급급해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이제는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인생은 시험의 연속이며, 모든 역경은 우리가 성장하고 도약하도록 돕는 발판이다. 부정적인 사건과 부정적인 사람들조차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원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존 고든 <에너지 버스>
그냥 하자
극복하진 못해도 기억할 수 있고 그 기억으로 배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많은 것이 달라져있었다. 어떤 선택을 할 때도 망설이지 않고 할 수 있었고 결과 역시 감안하는 용기를 배워나갔다. 여전히 배우는 중이나 사는 것이 평생 공부라고 한다면 배워나가는 지금이 내게 당연한 임무인 것이다. 일련의 일들, 이를테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났다가 헤어지고 하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등 여러 일을 겪을 때마다 더 이상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12가지 인생의 법칙'의 저자 조던 피터슨도 우리 역시 우리 스스로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했다. 우리 마음의 영혼은 늘 전체주의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이럴 거다."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다르게 일어났을 때는 생각보다 더 많지 않은가. 하지만 그 실망과 좌절의 화살을 나 자신에게 돌려버리면 앞으로 나아갈 힘조차 잃게 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단순하게 결정 내리고 행동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실천해 나아가고 있다. 간단하지만 이 단순한 진리를 실천해나가기까지 많은 연습이 필요했던 것 같다. 지금도 완벽하지 않고, 너무나 부족하지만 이 순간 쓰는 글마저도 그냥 써 내려가고 있기에 후회는 없다. 그저 미래에 어떤 이정표로 남을지 기대하고 있을 뿐이다.
어설펐지만 치열했던 몇 년의 불안과 그걸 해결하려고 했던 일들, 부끄러운 반성문 같은 글이다. 하지만 과거를 통해 배울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지금을 즐길 수 있기에 감사하다. 혹여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 아주 잠깐의 위안이 되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