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각자의 '페스트'를 안고 살아간다
전쟁이 터졌다. 어디에 전쟁이 있는가?
전쟁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전쟁의 혐오스러운 모습이 어디에 있느냐고 우리는 자문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가 마음속에 그것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충격적인 첫 문장. 인간의 존재를 부정하는 듯 하지만 결국 죽음으로써 삶을 긍정하는 '이방인'의 뫼르소의 짧으면서도 기막힌 인생을 보며, 카뮈가 '부정'을 의미하는 이방인의 다음 단계로 설정한 소설은 무엇인지 궁금증이 생겼다. 그렇게 '긍정'을 상징하는 카뮈의 저작 '페스트'를 읽게 되었다.
한 작은 도청 소재지에 불과한 프랑스의 오랑 시. 오랜시간 잠들었던 페스트가 깨어나면서, 잔잔하게 그러나 잔혹하게, 오랑시의 조용한 비극은 시작된다.
그렇게 시작된 페스트가 정점에 달했을 때, 오랑 시를 돌보는 의사 리유에게, 타루는 문득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심판을 내리는 장면을 두 눈으로 보았고, 이 때문에 괴로웠던 자신의 과거를 말이다. 이에 대한 죄책감과 괴로움 때문에 타루는 자신의 일평생을 페스트 속에서 살았다고 말한다.
처음 쥐들이 죽어가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이를 ‘페스트’라고 인정하는 것을 극도로 부정한다. 마치 페스트라고 말하지 않으면 이 전염병이 페스트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페스트’라는 이름은 다만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의 이름이 페스트인지 아닌지는 우리 삶 속에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었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페스트의 이름과 그 형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형태로는 페스트는 늘 우리 주변에 존재해왔으며, 그렇게 존재해 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타루는 마침내 저항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 아버지가 다른 이를 죽일 때, 그는 이에 저항하지 못했다. 문제의식을 느꼈지만 이것이 저항의 형태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저 나약하게 아버지와의 결별을 선언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억압이 페스트의 형태로 그에게 다가왔을 때, 그는 마침내 저항하기로 결정했다. 어쩌면 타루에게는 페스트라는 질병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진 존재였던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은 자신을 억압하는 존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로 결심했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의지적 존재가 되었다는 것. 그것이 페스트가 타루에게 가진 의미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의무는 인간에게 허위와 기만을 강요하며 인간의 진정한 존재를 부정하는 부조리와의 싸움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항하던 인물의 최후는 어쩌면 씁쓸하다.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어야만 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저항의 대가가 늘 행복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없기에, 결론이 그렇게 날지라도 타루의 삶은 의미가 있었기에, 그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페스트를 덮을 때 독자들에게 ‘저항하는 인생’을 살아라 라는 교훈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투쟁하는 삶 끝에 죽음이, 괴로움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그리고 그 선택을 통해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존재 아닐까? 그리고 그랬기에 일제 강점기에 우리는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으며, 암흑의 독재 시대에도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수 있었을 것이다.
페스트는 그냥 아무렇지 않게 종식된 것으로 사람들의 눈에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그 속에서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의지적으로 버틴 이들이 있었기에, 그 병이 지나가고 나서도 사람들이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현실이 아무리 잔혹하다 할지라도
희망을 놓지 않고 자신의 걸음을 이어나가는 것이야말로
이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진정한 반항이며 우리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