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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반장일지 07화

우연한 용기

시골 소녀의 서울 상경기

by 파인트리


그날은 겨울이었어요. 더 설명이 필요 없이 시골의 겨울은 무척 추웠습니다. 중3 여중생들이 교복 위에 입는 멋들어진 코트하나 장만할 형편이 못되어서 목도리 하나로 버티던 시절이었고요. 나는 시내 아이들이 끼고 있던 예쁜 손가락장갑을 부러워하면서 엄마가 떠주신 벙어리장갑으로 추위에게 들키지 않으려 손을 감추고 다녔습니다. 어린 시절 나는 겨울마다 소설에 빠졌어요. 한국문학 전집 스무 권을 빌려다 몇 날 며칠을 밤을 새워 읽어내고, 학교 도서관 소설책을 책가방에 넣을 수 있을 만큼 빌려오곤 했습니다. 교과서보다 소설책이 많이 들어있어서 찢어질 듯 무거운 내 책가방을 보고, 어머니는 공부 열심히 하느라 책이 많은 줄로 착각하셔서 나는 항상 미안함을 숨겨야 했지요. 겨울 방학이 다가오려던 어느 날, 소설 속에 빠져서 지내던 중3 꼬맹이 나는 갑자기 기차가 타고 싶어졌습니다. 기차를 타면 진짜 멋진 세상으로 데려다줄 것인지 가보고 싶었거든요. 아무 도시라도 좋았습니다.




어머니의 장바구니 심부름을 하면서 몇 백 원씩 돈을 모았습니다. 목표는 왕복 완행열차 값이었어요. 고등어 한 마리에도 조금 비쌌다고 뻥을 치고 고깃간의 고기들도 예상보다 비쌌다고 뻥을 쳤습니다. 어머니는 어차피 바빠서 읍내까지 값을 확인하러 가실 형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나는 나름대로 지능적 거짓말을 했던 것이지요. 읍내까지 시오리길, 하굣길에 장을 봐오라고 어머니는 곧잘 심부름을 시켰거든요. 장을 보아야 할 돈을 받고 나는 생선가게 앞의 고양이가 되어서 틈틈이 그 돈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원하던 돈이 모였습니다. 부모님께 들키지 않게 완행열차를 어떻게 타 볼 것인지 계획을 세웠어요. 아랫동네 사는 절친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오겠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외박은 안된다고 혼을 내시면서도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마지못해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시골 동네야 위 아랫동네 할 것 없이 숟가락 몇 개인지도 아는 사이였으니 그친구 부모님을 믿고 딸의 외박을 허락한 게지요. 하지만 나에게는 실행의 시간이었습니다.




역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밤 열차표를 구했습니다. 열차는 밤새 달려서 다음날 새벽에 서울역에 도착하는 완행열차였어요. 나는 중학생이 아닌 척 스무 살이던 고모의 연두색 코트를 훔쳐 입었습니다. 열차를 기다리던 내 눈은 긴장 속에서 빛이 나고 있었어요. 그 당시 시골에서 듣기로는 서울에 가면 눈뜨고 코를 베어 간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코를 뺏기지 않으려 목도리로 얼굴을 감싸고 기대하던 완행열차에 올랐습니다. 사람은 많고 입석이었어요. 출입문쪽에 자리를 잡고 절대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서 있으리라 다짐하고 꼿꼿하게 서 있었습니다. 어린애가 기차를 타고 있으니 걱정하는 어른들이 자꾸 어디 가냐 물었습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답을 하는 순간 코를 베어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있었거든요. 기차여행을 즐기려는 마음은 이미 없었습니다. 그저 공포와 두려움이 훨씬 많았으니까요. 철커덕, 철커덕 기차소리에만 집중했습니다.




꼿꼿하게 선채로 새벽녘 서울역에 도착했어요. 기차역에서 내려서 공포에 덜덜 떨면서 바로 다시 내려갈 기차표를 샀습니다. 누가 질문이라도 할까 봐 두어 시간 뒤에 오는 하행열차를 입을 앙다물고 기다렸어요. 사람들이 무서웠습니다. 어른들은 더 무서웠어요 . 묻는 말에 대답을 하면 어딘가로 데려갈 것만 같았거든요. 책 속에 보이던 도시의 환상은 없었습니다. 낯설고 크고 무서운 건물, 무서운 어른들만 있었어요. 기다리던 기차가 왔고 쏜살같이 기차에 올랐습니다. 목도리로 얼굴을 가리고 눈 만 빼꼼히 내놓은 채 대 여섯 시간을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역에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어요.




나는 고모의 연두색 코트를 얼른 제자리에 두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저녁상에 앉았습니다. 저녁을 먹는 동안 안도의 편안함이 허기로 몰려와서 그날 집안의 모든 음식을 혼자서 먹어 치운 것 같아요. 집이 주는 배부름과 편안함을 만끽했습니다. 천정을 바라보고 방바닥에 누운 채 따끈한 아랫목이 주는 행복이 몸안을 뱅글뱅글 돌아다녔어요. 그리고 조용히 낯선 외지를 다녀온 두려움이 뿌듯함으로 바뀌는 마음의 변화를 서서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여행이었어요. 하지만 덜덜 떨면서 다녀온 완행열차의 여행이 나에게 서서히 배짱이라는 힘으로 뿌리를 내리기시작했어요. 내 비밀스러운 여행은 내 안에 우연한 용기를 만들어 놓고 있었습니 다.




진급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책임이 더 막중한 자리입니다. 두려움은 없습니다. 회사와 동료들을 위해서 잘 해내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무엇을 줄까 고민하다 보니 꼬맹이 적 여행이 생각납니다. 혼자 뿌듯해하던 내 안의 뿌리 깊은 용기를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그 우연한 용기를 모두에게 나눠 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때의 용기는 은근한 배짱인 것 같기도 하구요. 배짱은 새로운 일을 두렵지 않게 하는것 같아요. 또 새로운 상황을 무섭게 느끼지도 않는것 같습니다.


계급장을 받고 나니 나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다짐이 생깁니다. 모두가 행복한 시간을 공유하면서 일하는 그런 직장을 만들어가고 싶다는 포부말이죠. 이 이야기를 했더니 동료 한 사람이 너무 이상을 쫓는다고 나를 나무랍니다. 그런데 그리 어려울까요? 사실 동료의 말이 틀린 건 아닙니다. 현장은 늘 바쁘고, 숫자와 시간, 품질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는 곳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불쑥 닥치는 변수 앞에서
‘모두가 행복한 직장’ 같은 말은 참 멀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그 거리를 조금이라도 줄여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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