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에 적응한 사람들
친정 시골 농수로에는 우렁이가 많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크기가 그대로였습니다.
폭염 때문인가 싶어 젊은 농부에게 물었더니,
“아니요, 환경에 적응한 거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농수로를 시멘트로 막아놓으니, 자신이 살아갈 장소의 크기를 가늠하고 더 이상 몸집을 키우지 않는다고 합니다. 놀랍도록 현명한 우렁이입니다.
다들 이렇게 환경에 적응하며 사는 모양입니다. 크기에 적응하고, 추위에 적응하고, 더위에 적응하면서 말입니다. 나 역시 십수 년을 식품회사에 다니면서 무더운 여름을 거의 느끼지 못했습니다. 밖에서는 “사상 초유의 폭염!” 하고 난리여도 작업장 안에선 서늘하다 못해 추워서 고생입니다.
밖의 온도가 폭염일수록 작업장의 온도는 더 내려서 신선도를 유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발 시림을 해결하겠다며 인터넷을 뒤지고, 손 시림을 막아보겠다고 별별 아이템을 다 찾아서 써 보고 있습니다. 발바닥엔 핫 파스를 붙이고, 상의 안에는 보온 조끼를 껴입고, 허리엔 복대를 찹니다.
작업장의 온도는 사계절 내내 15도 아래입니다. 여름철엔 12도 아래로 내려 가지요. 제품의 안전을 위해 직원이 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온도입니다. 일에 정신없이 몰입하면 오히려 땀이 줄줄 흐르지만, 하루 종일 같은 자리에 서서 토핑만 올리다 보면 금세 손끝이 시리고, 발바닥이 얼어붙는 일은 흔합니다.
즉석식품을 다루는 회사에서 온도 관리는 생명줄입니다. 아침마다 품질관리팀과 공무팀이 가장 먼저 점검하는 것도 작업장과 냉장고의 온도입니다. 우리도 조금이라도 변화를 느끼면 바로 알아챕니다. 몸이 먼저 반응을 하지요. 마스크를 쓴 채로도 콧속에 스며드는 냉기를 맡으면
“아, 오늘도 안전한 온도군.” 하고 감이 옵니다.
우리는 냉기만 아는 게 아니라 온기도 압니다. 그건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을 하거든요.
싸늘한 현장에서 나오자마자 폭염의 바깥세상과 맞닥뜨리는 순간—온몸이 찌르르, 묘한 교감이 시작됩니다.
얼었던 볼은 녹아내리느라 붉게 상기되고, 손끝 발끝은 찌릿찌릿 전율이 흐릅니다. 마치 몸속의 세포들이 “따뜻하다! 전파하라!” 하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퇴근길에는 헛둘헛둘, 몸 안에 바깥의 온기를 훅 밀어 넣넣습니다. 그러면 서서히 냉기가 물러납니다.
아직 덜 물러나고 몸 안에 남아있는 냉기 덕에 한여름 퇴근길도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걷습니다. 웬만한 열대야에도 낮에 간직해 온 몸속 냉기가 버텨주니, 시원하게 코 골며 잘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서늘한 현장의 부작용(?)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여기서 일하면 피부 탄력은 평생 보장”이라며 서로의 뽀얀 볼을 보며 웃습니다. 실제로는 추위에 달아오른 볼이지만, 기분 좋게 속아주는 동료애가 있습니다. 서늘함이 주는 고생도 많지만, 그래도 덕분에 여름을 버티고, 피부 칭찬도 받고, 열대야에도 꿀잠 자니— 이쯤 되면 냉기도 고맙다 싶습니다.
헤헤, 나도 어느새 우렁이처럼 환경에 적응한 사람인 모양입니다.
다만, 농수로 대신 작업장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