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있을 테스트 생산을 위한 점검을 했다. 이것저것 챙겨 보는 중에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생소한 도구가 있었다. 물론 구매 요청을 했고 주문도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불안했다. 본사에서도 참관을 하러 오는데 도구가 없는 생산은 상상이 안 되었다. 무엇보다 도구가 생산 시간 안에 도착할지 확신이 없었다.
“제가 내일 가지고 출근하겠습니다.” 나는 크게 장담을 했다.
그런데 퇴근길에 몸이 무거웠다. 매장은 직장에서 3km떨어져 있었다. 꼭 걸어서 가야만 하는 거리였다. 대중교통을 타려 해도 정류장까지 가는 거리와 매장이 비슷했고, 카카오 택시를 부르기는 더욱 애매한 거리였다. 몸이 천근 만근 한 발짝도 걷기 싫었다. 내 마음에서 악마의 얼굴이 나에게 속삭였다. `내일 아침 새벽시장에 가서 사면 되지. 어찌됐건 가져가면 되잖아.` 학교 다닐 때는 숙제를 안 하면 한잠도 못 자던 착한 나였는데 나이를 먹으니 게으름한테 책임감이 지고 있었다.
아침이 되었다. 새벽 6시에 도착할 수 있도록 일찌감치 택시를 탔다. 몇 년 전 새벽마다 자주 갔었던 시장으로 무작정 갔다. 분명히 내가 불러준 시장으로 택시는 도착했는데 상가가 엉망이다. 대부분의 상가는 비어있다. 상가를 한 바퀴 돌아봤다. 길에서 새벽일을 하시는 분을 붙들고
“죄송한데 여기 상가가 왜 이래요?” 물으니
“재개발돼서 저기 새 건물로 다들 이사 갔어요.” 한다.
새 건물로 들어갔다. 너무 많아서 찾을 길이 없다. 입구에 있는 반찬가게 사장님께 내가 찾는 그릇가게 상호를 대고 물었다.
“음~ 거기는 아직 이사 안 왔어요. 그대로 있을 거야.” 한다. 소득 없이 시간이 자꾸 흐르고 있었다.
다시 갔다. 다행이다. 내가 찾던 상호가 빛이 바랜 채 십여 년 전 그대로 있다. 반가웠다.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가게가 문을 열지 않았다. 주변을 살펴보니 조금 안쪽에 칼국수가게 하나가 문을 열고 있었다. 새벽이라 조심조심 칼국수가게 앞으로 갔다. 문 밖에서
“사장님 여쭤 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내 목소리가 애절해서 인지
장사 준비를 하시던 사장님이 밖으로 나오신다.
“옆집 그릇가게는 새벽에 문을 안 열어요?” 칼국수 가게 사장님은
“코로나 이후로 새벽에 문을 안 열어요. 이따 9시나 되어야 문을 열어요.” 순간 뒷골이 오싹했다.
알뜰주걱 뺏긴 칼국수집
하루 장사의 운수가 아침에 있다고 기침도 조심하는 자영업자의 간절함을 나도 잘 알고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알면서도 나는 칼국수가게 사장님께 하소연을 하고 말았다.
“사장님 혹시 알뜰 주걱 사 놓은거 있으세요?”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사장님께서 나를 바라봤다.
“오늘 저희 회사에 중요한 일이 있어요. 제가 알뜰주걱을 반드시 가지고 출근을 해야 합니다. 옆집 그릇 가게가 새벽에 문을 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어제 준비를 안 했어요.” 열심히 설명하는 나를 아주 빤히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던 사장님은
“새것은 없는데~”
라고 중얼거리면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아주 잠깐 후에 여자 사장님이 빠르게 걸어 나온다. 손에는 주걱 두 개가 들려있다.
“에구 우리가 새것은 가진 게 없어요. 이거 쓰던 거라도 괜찮으면 가지고 가세요. 출근길 바쁘실 텐데 어서 가세요.” 여자 사장님은 내 손에 주걱을 쥐어 준다. 그리고는 내 등을 떠밀어낸다. 나는 주걱 값을 드리겠다고 현금을 드렸다. 무슨 소리냐고 사장님은 현금을 내가방에 다시 넣으신다. 문득 만들어진 만두가 눈에 띄어서
“그럼 저 만두라도 사 갈게요.” 나는 만두를 덥석 집어 들었다.거스름돈이 남는다. 그것을 가지고 또잠시 받아라 안된다 실랑이를 했다. 출근길에 나서면서 죄송한 마음에 나는 자꾸 돌아보았다. 여전히 사장님 내외분은 가게 앞에서 어서 가라고 손짓을 한다. 그 모습에 또 가슴이 울컥했다. 일면식도 없던 우리의 느닷없던 짧은 만남이 하루 종일 내 마음에 긴 여운을 남겼다.
생각보다 새로 구입한 도구는 일찍 도착했다. 덕분에 사연있는 알뜰 주걱은 사용 하지 못했다. 내신 그 주걱은우리집 주방으로 모셔왔다. 내마음에는 감사라는 이름으로 주걱이 저장 되었다. 테스트는 무사히 마쳤고 귀한 만두는 존경하는 어르신께 선물로 드렸다. 퇴근시간이 조금 이른 날, 만두 가게로 동료들을 데리고 찾아갔다. 사연을 들은 동료들이 두말없이 동행을 해 주었다.
두 분 사장님과 나는 그날 아침의 이야기를 하면서 다정한 해후를 했다. 두 분 모두 오랫동안 보아온 인연처럼 내 손을 잡고 반가워했다. 그날 아침 두 분도 무조건 주걱을 어서 주어야겠다는 생각밖에 다른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참으로 인간애가 깊으신 분들이다. 우리 회사의 이번 신제품은 이런 인간애의 사연이 들어 있어서 깊이 사랑받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긴다. 더불어 나는 알뜰 주걱의 은혜를 가슴에 안은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인연을 만들어준 내 안의 악마의 얼굴은 어찌할까? 그래도 반성한다. 다시는 내 안의 악마의 속삭임을 듣지 않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