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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인트리 Jun 23. 2023

"날인이 안 돼요"

다시 태어나면 공대에 가고 싶다.



퇴근시간까지 30여분 남았다. 기계만 이상 없으면 오늘의 생산성 목표는 무난하게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산수량이 잘 나올 방법으로 인원배정을 다시 했다. 작업분위기도 안정적이어서 제품의 퀄리티도 좋아 보였다. 만족스럽게 현장이 흘러가고 있었다. 나도 안심을 하면서 퇴근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 안심이 오래가지 않았다.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왜 그래요?" 내가 달려가니

"갑자기 날인이 안 돼요." 동료가 걱정스레 말을 한다.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내가 재차 묻자

"네. 정말 잘 돌아가다 갑자기 안 됐어요." 한다. 후다닥 기계 앞으로 갔다. 별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살펴봤다.  역시 날인이 안 되고 있다. 제품의 표기사항을 프린터로 해결해야 하는 마지막 작업이었다. 그 프린팅을 우리는 날인이라고 불렀다. 작업을 중단한 채  열 명이 넘는 인원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순간적으로 빨리 작동시켜야겠다는 생각만 앞섰다. 기계를 작동시켜 봤다. 날인이 안 되고 휘리릭 필름이 지나간다. 점검하는 동안 십 여분의 시간이 순삭 지나갔다. 결단이 빨라야 한다. 다른 기계로 이동해서 작업을 마무리시켰다. 그리고는 동료들에게는 퇴근 준비를 시키고 나는 다시 기계와 마주 섰다.


해결 안되면 도움 요청하려고 사진을 찍어뒀다.


일단 전원을 껐다. 그만그만한 잔 고장은 기계를 껐다가 켜면 대부분 재부팅이 된다. 이번에는 아니다. 역시 날인이 안 되고 있다. 화면에는 메모리부족이라고 떠 있다. 처음 보는 오류다. 기계의 겉모습은 달라진 게 없다. 먹지를 살펴봤다. 문제가 없다. 메모리 부족이라니 무슨 뜻일까? 컴퓨터에서는 이미지를 더 키우고 싶을 때 가끔 그래픽카드의 용량이 부족하여 메모리부족이란 단어가 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상황도 정상 인쇄를 하고 싶지만 할 수 없으니 메모리 부족이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추리가 꼬리를 물었다. 정상 날인을 할 수 없는 경우는 필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경우와 필름이 멈춰버리는 경우 딱 두 가지가 있다.


 일단 필름의 이동 상태를 확인했다. 정상이다. 필름이 빨리 가는 경우는 아이마크가 정지 신호를 제대로 잡아줘야 하는데 그 기능을 하지 못할 때이다. 아이마크는 필름에 인쇄를 하도록 잠시 멈춤을 해주는 역할을 하는 기능이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마크가 정상작동을 했다. 설마 아이마크가 오작동을 하는 걸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작업도중 의식하지 못한 채 누가 건드렸을까?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이마크센서를 재부팅했다. 조심스레 인쇄 정지를 하고 필름 이송을 해봤다. 정상으로 멈춤이 된다. 다시 인쇄 시작을 누르고  필름을 보내봤다. 날인이 잘 된다. 기계는 내가 원하는 대로 정상 작동되었다. 잘 되고 있을 거라고 믿었던 아이마크가 문제였던 것이다. 다행이다. 빠르게 결단을 내려 일을 마무리시킨 것도, 기계를 정상으로 돌려놓은 것도 안심이 되었다.


다 큰 아이들이 계란후라이 꽃이라고 부른다. 계란 후라이가 지천에 널려있네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 난다. 좀 더 일찍 생각해 내지 못한 나에 대한 분노다. 문제가 발생하면 문제의 원인에 집중해야 한다. 핵심이 정확히 무엇인지 분석해야 한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마음만 앞서서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나에게 화가 났다. 당황하면 갈팡질팡 핵심을 흐리는 감춰진 나의 단점은 여지없이 노출되었다. 오랜 경력에도 평정심을 갖지 못하는 내가 참 안타까웠다. 그 순간 평정심이라는 단어는 내 머릿속에서 어디로 나들이를 가버렸던 것일까.


문제가 발생하면 평정심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문제의 본질이 보인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할 때가 많다.  단순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잠시 안일했다. 문제에만 집중하면  순리대로 풀려 나가는 것들을 그동안 인생 경험에서 많이 보아 왔지 않은가. 그것을 알면서도 십여 명을 세워두고 헛고생으로 십여 분을 낭비했다. 그나마  다행히 앞으로는 이 같은 순간이 온다면 척척박사처럼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숨을 고르고 현장을 둘러보니 동료들은 아무도 없는데 나는 기계들과 한껏 친해진 기분이 든다. 말을 하는 기계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다시 태어나면 공대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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