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에 나는 고작 15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어머니가 나에게 완벽함을 요구하는 편이라면 아버지는 내가 맘껏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주신 분이었다. 아버지는 세상을 살려면 절대로 주변에 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까지도 누구랑 싸우는 걸 못한다.
아버지는 평생 많은 연구와 발명을 하셨는데 그렇게 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표창이나 공로는 제자들이나 다른 직장 동료에게 돌렸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의 한 달 급여가 100원 정도였는데 장례 조의금이 무려 4,000원이나 들어와서 어머니가 너무 깜짝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의 실력과 공도 공이거니와 인품으로 주변에서 많이 좋아해 주었던 것 같았다.
엄마와 아빠의 러브레터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언니와 오빠와 함께 아버지의 사무실을 찾아가서 유품을 가져왔다. 그때 아버지의 일기책 몇 권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 식구들은 아버지가 남기신 일기책들을 돌아가며 열심히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아버지가 17살 OO 화학 공대에 입학하던 1950년대부터 내가 태어나기 전 언니‧오빠를 낳아 기르던 70년대까지 무려 25년 동안의 삶이 담겨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가 그렇게 오랜 시간 일기를 쓰고 계신 줄 몰랐다고 하셨다. 평소 어머니랑 그렇게 다정하셨던 아버지가 일기는 늘 집무실에서 쓰셨나 보다.
일기 속에는 대학생 시절 아빠의 청춘시절도 있고, 이모부의 소개로 엄마와 첫 선을 본 이야기, 엄마와 첫 키스를 나누었던 이야기며, 김일 부수상과 독대를 했던 이야기도 있었다. 엄마의 친가가 모두 남한에 있어서 처갓집 가정배경 때문에 실력 있는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평양으로 올라가지 못한 사연도 그때에야 알게 되었다. 일기 중에는 "남들은 이제라도 처가와 인연을 끊고 평양을 가라 하는데 어찌 출세를 위해 처자식을 버린단 말인가" 하며 힘들어했던 아버지의 고뇌도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일기장들을 읽으면서 나는 아버지를 더 잘 알게 되고 더 존경하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나 언니가 약혼을 하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장롱 깊숙이 보관되어 오던 낡은 편지 묶음을 꺼내시어 언니 보고 읽어보라 하신다. 어릴 적부터 그 종이 묶음의 정체가 궁금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나중에 보여주신다고 했었다. 그것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약혼식을 올리고 결혼 전까지 주고받았던 편지들이었다. 낡은 편지 묶음 표지에는 "사랑이 깃든 편지"라고 쓴 어머니의 필체가 있었다.
때는 60년대 초반 어머니는 청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황해도 사리원의 작은 시골 진료소에 배치받아서 청진에 있는 아버지와 자주 볼 수 없기에 우편으로 주고받던 편지들이었다. 편지마다에는 우편봉투의 우표와 날짜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밤에 당직을 서면서 어머니가 쓰신 편지 구절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최상공께 드리나이다. 밝은 달빛을 바라보면서..."
그러면 아버지의 화답 시는 "순이의 모습이 어쩌고 저쩌고..." (어머니의 이름이 O순이어서 아버지는 순이라 부르신 듯)
50년대 대학을 다니신 부모님, 당대 신청년으로서 약혼사진 찍을 때 엄마의 제안으로 책을 보는 컨셉을 연출했다고 하신다.
언니와 나는 웃다가 울다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의 편지들을 읽으면서 부모님의 사랑이 정말 깊었다는 것을 더 잘 알게 된 것 같았다. 어머니는 언니에게 이제는 시집갈 때가 되니까 사랑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보여준다 하신다.
실제로 엄마와 아빠는 우리자식들 앞에서 큰 소리 한 번 안내시고 자상하고 따뜻한 관계를 보여주신 것 같다.
한번은 어느 화창한 가을날, 아마 9월 9일 공화국 창건 기념일로 기억한다. 그날 가족사진을 찍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동네 아주머니들이 한복을 곱게 입은 어머니를 불러 세웠다. 마침 어머니가 새로 한복을 맞추어서 처음 입은 날이라 어머니도 기분 좋으셔서 한복을 자랑하시고 사람들은 이쁘다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지 않으시고 뒷짐 짓고 어머니의 모습을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바라보던 모습을 나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두 분은 정말 서로를 존경하고 애틋하게 여기는 참사랑을 하신 것 같다.
부모님의 금실이 좋은 것이 자녀인 우리에게 두고두고 좋은 영향을 주는 것 같아 늘 감사한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 나다.
아버지가 가신 이후 어머니는 여전히 고우시고 직업이 의사이시라 중매꾼들이 문지방 닳듯이 찾아왔지만 어머니는 평생 재혼을 하지 않으셨다. 탈북하기 2년 전 어느 날 어머니에게 내가 왜 그때 재혼을 하지 않으셨나고 물은 적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들이 너무너무 행복해서 다른 사람이 가슴에 들어올 수 없었다고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말씀은 안 하셔도 어머니는 처갓집 토대 때문에 더 위로 올라가지 못하신 아버지에게 평생 미안함과 고마움을 간직하고 계셨지 싶다.
어머니는 그때 아버지가 남기신 일기를 읽고 읽으면서 아버지와의 사랑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그리워하고 또 사무치게 그리워하신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니 부모님들이 64년도 결혼하시고 아버지가 89년도에 돌아가셨으니 두 분이 함께 한 시간은 25년밖에 되지 않았다. 현재 내가 남편과 함께 한 세월이 23년이니 엄마와 아빠가 함께 한 시간과 비슷하다. 내가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보니 아빠 없이 산 지난 수십 년이 엄마에게 얼마나 힘든 시간들이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부모님이 너무 사무치게 그리워서 몇 년 전 여러경로를 통해 정말 어렵게 부모님의 약혼사진을 받았다. 사진 속 아버지는 그렇게 멋지시고 엄마는 또 그렇게 아름다우시다.
올해 여든여섯인 울 엄마, 백발의 모습도 사진으로 받았지만 너무 가슴 아파서 자주 보지 않는다. 지금은 휴대폰 바탕화면에 넣고 늘 엄마 아빠의 사진을 본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부모님의 사진, 얼마 전에는 컵에 담아 지금 글을 쓰는 순간에도 두 분 모습을 보면서 차를 마시고 늘 두 분과 함께 있는 상상을 한다.
아, 어머니~ 올해 한식에도 불편한 몸으로 산소를 가셨는지요, 아니면 혹시라도 아빠와 재회하셨는지요. 이 불효한 막내딸은 오늘도 엄마, 아빠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울면서 잠이 듭니다.
통일이 아니더라도 서로 왕래를 하지 못하더라도 서신과 전화통화라도 할 수 있는 그날이 언제나 올까나? 누구보다도 나에게 분단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런 사실이 항상 나를 슬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