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로운 여행지를 가는 것도 좋아하지만 갔던 곳을 또 가는 것도 좋아한다. 갔던 장소에서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이 좋기도 하고, 같은 장소임에도 다른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이 색다르게 다가와서 좋다. 물론 때때로 쓸쓸함을 느끼게 할지라도..
서쪽에서 남쪽으로 해안 따라가는 길을 정한 이유도 갔던 장소들을 다시 가고 싶기 때문도 있었다. 곽지해수욕장과 신창 풍차해안도로가 그에 해당했는다. 서귀포시에는 다시 가고 싶은 장소가 있었지만, 같은 장소에 가도 그때의 기분을 느낄 수 없을 것을 알았다.
지인의 지인이 하는 숙소에 다 같이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동네 짜장면 집에서 배달시킨 음식을 친구들이 하나씩 들고, 바다가 보이는 방파제에 대충 앉았다. 우리는 짜장면을 안주 삼아 마트에서 사 온 와인으로 짠을 했다. 와인 코르크를 와인잔에 넣기 게임을 하며 놀았던 그날의 우리의 청춘은 낭만적이었다.
그때의 추억은 장소가 아닌 친구들과 날씨이기 때문에 서귀포시 그 자리에 가도 느낄 수 없을 기분이다. 그럼에도 서귀포시로 온 이유는 전에 가보지 못한 곳을 가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재밌는 사연이 있다.
때는 어느 해의 내 생일 2일 전 일이었다. 목요일에 화상으로 회사 교육을 듣고 있는데, 카톡이 하나 온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나와 약속이 있던 언니가 갑자기 제주도라는 것이다. ”너도 올래? “ 모종의 기분 전환의 이유로 갑자기 제주도로 간 언니는 그냥 한번 던지듯이 물어본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확실하게 물었다. 사실 언니는 24일 낮에 돌아와 저녁에 나를 만날 계획이었다. 그러나 기분전환이 나에게도 필요했기에, 당일 목요일 퇴근을 집이 아닌 김포로 가서, 제주도로 날아갔다. 서귀포시에 있는 언니는 다음날 제주시로 넘어오기로 했다. 나는 목요일밤 혼자 제주시 호텔에 도착했고, 다음 날 금요일은 다행히 재택근무였기 때문에, 호텔에서 일을 했다.
언니는 서귀포시에서 제주시로 올라오면서 사려니숲길을 잠시 걷다가 온다고 했다. 대학교 선배의 추천으로 사려니숲길을 간 것이었다. 사려니숲길은 잠깐 둘러만 보는 곳과 둘레길의 긴 코스가 있다. 둘레길 코스로 가면 등산객 복장을 한 분들을 만날 수 있는데, 언니는 잘못 가는 바람에 그 긴 코스로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점심이 조금 지나면 온다던 언니는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궁금해서 나는 연락을 해보았다.
”언니 어디야? “
“나 사려니숲길“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연락해 보았다.
“언니 언제 와? 아직도 숲길이야?”
“길이 안 끝나,, ㅠ 분명히 좀만 더 가면 끝이라고 했는데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여, 가방에 노트북 들어서 무거운데 ㅠㅠ 나 물도 없는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언니의 SNS 스토리에는 숲길을 걷다가 마주친 사슴들과 대치를 이루고 있는 사진이 올라왔다. 결국 언니는 온다고 하던 시간을 훌쩍 넘겨, 정확히 나의 퇴근에 맞추어 숙소에 도착했다. 사연을 들어보니 가볍게 숲을 걸으며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는데, 선배는 가물가물한 기억으로 잘못된 코스로 길을 가르쳐 준 것이었다. 그리하여 언니는 2kg짜리 노트북이 든 가방을 메고, 물도 없이 10km를 걸은 것이었다.
그때 사연을 듣고, 언젠가는 혼자 사려니숲길을 가려고 했다. 어찌 보면 내가 서귀포로 온 유일한 이유였다. 그런데 첫닐 호스텔 불멍을 하다가 일행이 생긴 것이다. 한 분이 자신은 일정이 없다며 따라가겠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혼자 산책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런데 또 다른 분이 오더니 자신도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행이 생긴 채로 갔지만 한 명은 청바지를 나머지 한 명은 슬랙스를 입고 온 차림을 보고 ‘10km는 못 걷겠구나’ 직감했다.
둘레길은 아니지만 언니가 원래 가려던 짧은 코스 산책을 내가 하다 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울창한 나무 사이로 하늘이 보였고, 그 사이로 마치 신이라도 강림할 것 같은 햇살이 내리쬐었다. 새로 생긴 일행들 덕분에 제일 걱정이었던 버스 배차는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차로 이동하면서 도로에 가지런히 나열된 나무들로 모두 감탄을 절로 했다. 비록 계획은 조금 바뀌었지만,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서귀포시 음식들도 먹을 수 있었다. 혼자였다면 치킨은 먹지 못했을 텐데, 계획과 맞바꾼 마늘치킨과 모닥치기(모두 합쳤다는 뜻으로, 김밥 군만두 어묵 삶은 달걀을 떡볶이 국물에 비벼 먹는 메뉴이다)는 최고였다.
누구나 때때로 계획은 틀어진다. 계획형 인간이라 일정이 바뀌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가보지 않은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으니. 무거운 노트북을 메고 물 없이 10km를 걸었던 언니. 10km를 걸으려 했지만 조금의 산책 후 음식만 잔뜩 먹은 나. 이제와 생각하면, 뭐든 좋지 않았나 싶다.
고된 일정의 반복이라 나는 그날 낮잠을 푹 잤다. 모두가
여행 나간 호스텔은 고요했다. 그리고 그날밤의 모닥불 시간엔 엄청난 외향인들이 등장하는데..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