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할수록 떠오르고 또 엮이는 당신에 대하여
마음에 미움을 두었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자꾸 그 대상과 엮이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 미움을 누군가에게 표현한 적도 없고 언쟁을 벌인적도 없지요. 그럼에도 자꾸 마주치게 되고 불편한 상황들이 생깁니다. 은연중에 나의 미움이 얼굴에 드러나 그에게 비쳤을지는 모릅니다. 그럼에도 잊을만하면 그 얼굴이 떠오르는 것도 모자라 내 앞에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회사에서든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든, 피하고 싶은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할수록 그와 만나게 되는 우연이 늘어갑니다. 몸도 마음도 피곤해지고 이런 사소한 것에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는 나 자신에 화가 나기도 하고 답답함이 커져갑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미움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마음을 다잡기 위해 평온을 가져다줄 법한 책 몇 권에 의지해 스스로를 다스려보고자 애를 쓰지만, 교과서적으로 원칙만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 이전보다 더 갑갑해집니다. 원수를 사랑할 만큼의 아량도 없고 그럴 재간도 없으니 도망치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들여다보았습니다. 왜 나는 그에 대한 미움을 갖게 되었고, 시간이 흘러도 이 미움의 크기는 줄어들지 않는 것인지.
어떤 사건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더듬어 올라갑니다.
특정 시간, 공간에서 벌어진 매너 없는 그의 행동과 말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의 시간에 피해를 준 것이라 생각했고 왜 저렇게 행동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와 보면 별 것 아니었을 그 일을 당시엔 꽤 오래 곱씹었던 것 같습니다. 상황이 어찌 되었건 그이를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분명했던 모양입니다.
또 하나의 사건과 또 다른 인물이 있습니다. 저녁 약속을 잡아두었는데 그 사람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약속을 잊었다고 했고 급한 일로 야근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 일 이후 그와 연락을 하고 지내지는 않지만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탓에 마트를 가거나 조깅을 할 때 마주치게 되는 일들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의 표정이 일그러짐을 느끼고 나의 시선을 피하는 그의 모습도 두 눈에 들어옵니다. 그렇게 잊고 지내고 감춰두었던 미움은 다시 타오릅니다.
이런 일들이 예상치 않은 상황에서 발생하게 되면 나의 표정과 시선과 감정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미움이라고 하기엔 어울리지 않을 만한 감정의 찌꺼기만 남은 것 같은데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것 또한 미움이라 불러야겠지요. 지금으로선 말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그에 대한 미움으로 나의 마음을 소진하고 있을 때, 과연 그는 나에 대한 미안함을 갖고 있었을까. 아니 미안함이 아니더라도, 내가 그에 대한 생각으로 잠깐의 시간을 내어볼 때 그는 나에 대한 생각을 했었을까. 나 혼자만 스스로 감정이 시들어가는 길로 걷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그때 가졌던 미움보다 나의 어리석었던 편협함을 탓하게 됩니다. 역지사지의 여유까지는 어렵더라도, 그냥 흘려보낼 수도 있지 않은 문제였나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싫다고 생각했던 그 행동을 '미움의 대상'으로 정의한 것도 나였고, 그 감정을 내 삶에 끼워 넣은 것도 나였습니다. 스스로를 곪게 만드는 선택을 했던 것은 그의 의도가 아닌 나의 선택이었습니다.
내가 더 이해해 볼 만한 여지는 없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한때는 이런 생각 자체가 나의 손해라 여기던 때가 있기도 했습니다만, 아주 작지만 귀한 삶의 진실들을 하나둘 배워가는 지금의 시기엔 이런 생각의 물러섬이 나를 더 편안하게 만들어줍니다. 다시 그와 이어질 수 없는 연이라 하더라도 그에 대한 미움을, 그것도 혼자만 그런 미움을 간직한 채 살아갈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할만한 아량이 없다면 나의 세계에서 조용히 떠내려가는 물과 같다 여기는 편이 내게 이롭겠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소한 용서를 구해봅니다. 그에게 전달되지 않을 이야기겠으나, 잠시나마 혹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 당신을 내 마음의 미움이라 규정하고 그 안에 가두고 나를 어지럽게 하고 아프게 하고 다치게 하여 당신에 대한 미움을 증폭시킨 나의 선택과 결정에 대한 용서를 말입니다. 미움을 떠나보내는 지극히 개인적인 의식과도 같습니다. 살면서 언제든 이런 상황들은 계속해서 생겨날 수 있겠지만, 그때마다 마음의 시냇물을 떠올려보려 합니다. 그리곤 유유히 나의 어지러운 미움의 감정들이 떠내려가는 상상을 해봅니다.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나의 숨도 고르게 쉬어집니다. 방안의 창으로 쏟아지는 평일 아침의 햇빛이 이렇게도 환하고 밝았음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나의 우주 안에서, 미움에 대하여
'안녕'하고 말하며 손을 흔들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