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힘의 원천

살구꽃과 어머니

by 고아함

우리 집에는 봄철이면 분홍빛으로 환하게 피어오르던 살구꽃이 있었다. 그 살구꽃은 넓은 안마당과 텃밭, 대문 밖으로 이어지며 밤이면 가로등처럼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낮이면 화사한 햇살 아래 솜사탕처럼 몽실거렸다. 대문 밖 살구꽃은 양옆의 작은 텃밭을 따라 150미터 정도 떨어져 우리 집으로 들어서는 진입로에 있었다. 객지에서 고향집을 찾아올 때면 가장 먼저 만나는 살구꽃, 그리고 대문을 열고 반갑게 종종걸음으로 나오시는 어머니가 있었다.

“톡톡 톡, 탁-탁.”

부엌에서 어머니의 분주한 도마질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일어나야 할 시간, 이른 아침 공기를 가르며 다가오는 어머니의 부지런한 움직임에 뜨뜻한 아랫목을 박차고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의 하루 일과는 걸레를 빨아 밤새 쌓인 마루의 먼지를 닦는 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부엌에 들어가 어머니의 아침 식사 준비를 도왔다.

“그래 이번에는 집에 오래 있다 개학하면 대학교 가는 거지?”

반찬 준비로 연신 바쁘게 손놀림을 하면서 어머니는 내게 물었다.

“아니 저 - 엄마, 재시험 보러 한 번은 학교에 가야 하는데…….”

“재시험이 뭔데?”

그때 뜨락에 나와 있던 오빠가 모녀지간의 대화를 들었는지 부엌 문설주에 다가와 참견을 했다.

“그러니까 엄마, 야가 시험에 멸치 눈이 몇 개입니까? 하고 문제가 나왔는데 4개입니다 하고 답을 쓴 거여.

그래서 다시 시험을 봐야 한다는 거여.”

기가 막혔다. 오빠는 슬쩍 내게 눈짓을 하며 빙긋 웃었다.

“아이구 야야, 그래 멸치 눈이 두 개지 어째서 네 개냐? 너는 멸치를 그렇게 먹고도 그걸 틀리냐? 쯧-쯧-쯧.”

어머니는 너무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오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어머니의 순박함이 나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학교 공부를 우리들처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어머니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어머니 수준에서 재시험을 이해하도록 설명한 오빠의 재치와 유머는 오래도록 생각하면 웃음이 나왔다.

어머니는 너희들이 집에 왔으니 떡도 하고 닭도 삶아야 한다며 연신 바쁘게 움직였다. 커다란 대야에 쌀을 퍼 담고 물로 씻어 낸 다음 물에 담갔다. 양대 콩도 씻어 물에 불렸다. 곡물이 물에서 불려질 때를 틈타 그새 어머니는 또 바쁘게 닭장으로 가셨다. 암탉 한 마리가 어머니 손에 영락없이 붙들렸다. 닭은 ‘꼬꼬댁’ 대며 날개를 퍼덕이고 난리가 났다. 그러나 닭은 이내 꼼짝없이 뒤뜰로 잡혀갔고 한순간 조용해졌다.

작은 가마솥에 닭은 찹쌀과 생강, 대추, 밤, 인삼과 함께 넣어져 아궁이의 장작불에 달구어졌다. 구수한 냄새가 집안을 맴돌아 이웃집 담장으로 번져갔다. 식구들은 상에 둘러앉아 닭백숙으로 맛난 점심 식사를 하였다.

그동안 물에 불려진 쌀은 손수레에 실려져 방앗간으로 가 쌀가루가 되어 돌아왔고, 양대 콩은 맷돌에 한 번 돌려진 후 하얀 천에 담겨 가마솥에서 푹 익었다. 그리고 체를 통과해 고운 시루떡 고물이 되었다. 이어 사랑채 아궁이 가마솥 위에 옹기 시루가 얹혔다. 시루와 솥이 만나는 가장자리는 어머니의 정성스러운 손길에 의해 된 밀가루 반죽으로 밀봉되었다.

저녁 어둠이 밀려들었다. 살구꽃 향내가 ‘후욱’ 코끝에 미치는데 어머니는 연신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작불을 땠다. 확 타 오르는 불빛에 번득이는 어머니의 발그레한 얼굴은 밤의 전령 같았다. 시루떡은 김을 모락모락 피워내며 서서히 익어갔다. 드디어 시루 뚜껑이 열리고 보송보송한 노란 고물 떡이 드러났다.

마루에는 전등 불빛이 환하게 켜졌다. 어머니는 오빠와 함께 떡시루를 마루로 옮겨서 접시와 쟁반에 담아 식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감칠맛 나는 시루떡을 먹으며 가족들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워냈다. 점점 밤은 깊어갔고 널따란 안마당과 텃밭, 대문 밖으로 이어지는 살구 꽂은 은은한 꽃등을 켜 깊어 가는 밤을 밝혔다.


이제는 고향에 가도 이런 풍경은 없다. 대문 밖까지 나와 떠나가는 자식들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던 어머니는 손수 자신의 수의까지 마련해 놓고, 인생의 생로병사를 따라 하늘나라로 가셨다. 일손을 놓으신 아버지를 대신해 농사일까지 하며 자식들이 오면 하나하나 없어질 가축을 키우고, 그토록 수고로운 음식을 만들어 냈던 어머니.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겪고 열 두 남매를 낳아 키우다 두 아들을 먼저 천둥 치는 통곡으로 저 세상에 보냈다. 나도 자식을 둔 어미가 되었다. 지금도 어머니는 여전히 내 가슴속에 살아,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인생의 고통을 억척스럽게 살아내신 당신의 모습으로 새 힘을 북돋운다.

활짝 피어난 살구꽃에 아른거리며 오래도록 대문에 서서 손을 흔들고 미소를 지으며…….

**커버/하 사진-고아함

keyword
이전 15화스토리(story)가 머문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