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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티제 Oct 24. 2021

70살이 되어야 할 수 있는 이야기

여기도 사랑과 전쟁이네

 아빠는 자신의 연애사의 일부를 숨기고 있었다. 60살이 되어서도 못할만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나?




나: 아빠, 우리 사이에 숨길게 뭐 있어. 오래전 일인데.

아빠: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10년 뒤에 일흔 정도 되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 무슨 얘기길래 70살까지? 말해 줄 수 있는 것만 말해 줘. 첫 사랑 얘기부터!

아빠: 음. 아빠가 드라마 <나의 아저씨> 좋아하는 거 알지? 드라마에 그런 장면이 있어. 남자 주인공인 이선균(박동훈 분)이 여자 주인공인 아이유(이지안 분)와 조금 가까워졌을 때야. 남자가 자주 가는 식당이 있어. 식당에서 가서 혹시 함께 자주 왔던 여자애 안 왔냐고 물어보거든. 그렇게 아이유를 기다리다 결국 아이유가 오지 않으니 그냥 가려고 하거든. 

https://www.youtube.com/watch?v=HFAqwhNWHpA

2:30초 쯤 부터

 사실 그 상황을 여자 주인공이 도청으로 듣고 있잖아. 아이유도 이선균을 보려고 막 뛰어서 그 술집에 가는데, 그때 둘이 마주친 다음에 나눴던 대화가 있어. 이선균이 이제 자긴 다 먹었으니 갈 거라고 얘기하는데 아이유가 이선균을 붙잡으면서 술 한 잔만 더 하자고 해. 사실 이선균도 아이유가 보고 싶었는데, 그런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지. 하지만 보고 싶었으니 자리에 앉아서 여자 주인공과 술 한 잔 더 하고. 그런……. 그 장면 보는데 순간 젊었을 때 생각이 나더라고.     


나: 누군가를 기다리고 그랬던 순간들이 떠오른 거야?

아빠: 그때가 군대 가기 얼마 전이었어. 그 시절에는 휴대전화랑 삐삐가 없었어. 그러니까 밖에 있을 때는 서로 연락할 방법이 없었어. 아빠는 교회 전도사님이랑 몰래 연애를 하던 중이었어. 첫 여자친구지.

 첫 여자친구인 데다가 곧 군대에 가니까 하루하루 그분이랑 있는 시간이 소중했어. 그러다가 토요일이었나, 교회에서 행사가 있었어. 행사가 끝나고 따로 데이트를 하기로 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중학생들이 나한테 전도사님 집 머니까 같이 배웅하자고 하더니 버스에 태워서 보내 버리는 거야. 혼자 버스에 태워서 보내 버리면 도저히 다시 만나기가 어려운데, 순간적으로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았지.


나: 비밀연애 중이라서 어떻게 말을 못 했구나?

아빠:  그지. ‘이거 어떡하나. 다시 만나야 되는데.’ 계속 생각했지. 그분이 버스를 타고 간 다음 아빠는 바로  택시를 탔어. 돈도 별로 없었는데 말이야.     


나: 여자친구 만나려고 택시 타고 버스를 쫓아간 거야?

아빠: 그분이 광화문에서 내리고 육교를 건너 육십 몇 번 버스로 환승을 했거든. 내가 광화문까지만 먼저 간 다음 육교에서 기다리면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가면서 초조했어. 혹시 그냥 지나가 버렸을까 봐. 육교에 도착해서 그분을 기다리니까 얼마 있다 그분이 타고 갔던 버스가 오는 거야.

 육교 위에서 그분이 걸어오는 걸 보는데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그분도 육교에 올라왔는데 내가 보이니 서로 엄청 좋아하고 그랬지. 들어보니 본인도 돌아갈까 하다가 엇갈릴 것 같아서 고민을 많이 했더라고. 그때 느낌이 떠올랐어. 길이 엇갈릴까 봐 막 달려가는 장면, 그 장면은 진심 같더라. 지안이가 박동훈을 만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 같은 그 맥박과 표정.      


나: 그렇게 좋아하는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군대 가기 싫었겠다. 당시 복무 기간이 어느 정도였어?

아빠: 30개월. 근데 대학생은 학교에서 교련 수업을 받으면 군 복무 기간이 줄어들었어. 대학교 1학년 때도, 부대에 일주일 입소해서 훈련을 받아. 그러면 난리가 나. 겨우 일주일인데도 여자친구들이 편지 쓰고 과자 가져다주고. 일주일 뒤에는 제대한 것처럼 다 같이 막걸리 마시러 가고. 웃기지. 사실 머리도 안 밀었는데. 그러고서 2학년이 되면 일주일 동안 전방에 가. 이걸 다 듣고 가면 총 90일 정도 복무 기간을 줄여 줬어.     


나: 그럼 27개월이었겠네?

아빠: 아니. 2학년 2학기 끝나고 군대에 가야 하는데, 아빠는 2학년 1학기 마치고 갔거든. 그때는 전공도 어렵고, 군대를 빨리 다녀와야 당시 여자친구랑 결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 지금 생각해 보면 한 학기 차이로 해결될 일이 없는데도 이상한 확신을 갖고 있었지. 상당히 충동적이었어.    

  

나: 생각보다 아빠가 즉흥으로 결정을 많이 내린 것 같네.

아빠: 말하고 보니 그러네. 이건 엄마한테도 말하지 않은 얘긴데, 제대하고 복학을 해야 하잖아. 그래서 학교에 갔더니 내가 제적 처리된 거야. 난 분명 군대 가기 전에 휴학계를 내고 갔는데 뭔가 꼬였나 봐. 보통은 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는데, 그냥 ‘잘됐다. 어차피 재미도 없었는데 그만하자. 학비도 부담스러웠는데.’ 이런 생각을 했어. 그래서 결심한 김에 그냥 돈을 조금 빼서 술을 마셨어.       


나: 아빠 미쳤다. 

아빠: 집에 가서 할머니한테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얘기했어. 그러니까 할머니가 우시더라고. 자식들만큼은 남 부럽지 않게 공부시키는 게 당신한테는 사명이었던 거지. 그렇게 대학 보내 놓았는데 아들이 그만둔다고 하니까 꼭 등록해야 된다면서 우시더라고.

 할머니가 그렇게까지 하시니 등록을 해야 할 것 같은 거야. 근데 술값으로 돈을 조금 썼다고 솔직하게 얘기했어. 그랬더니 바로 반지를 빼서 나한테 주더라고.      


나: 아빠, 그 순간만큼은 불효자였다.

아빠: 나도 바로 학교에 찾아가서 행정착오 때문인 것 같다고 읍소했어. 학교에서도 행정착오 같다고 했지. 그럼 바로 해결해 줘야 하는데, 부모님 자필로 탄원서를 써서 제출하라는 거야. 웃기지? 결국 할아버지가 써준 탄원서로 잘 해결했어.



 너무 자연스러워서 눈치채지 못할 뻔 했지만, 문득 대화 주제가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애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아빠 학교 자퇴할 뻔 한 이야기를 하게 되다니?


나: 잠깐 이야기가 다른 길로 샜어. 혹시 일부러 피하고 있는 건 아니지? 다시 연애 얘기를 해 줘. 첫 번째 여자친구랑은 그러고 나서 언제 헤어진 거야?

아빠: 군대 제대하고 헤어졌어. 제대하니까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고 공부하는 데에 더 집중하게 됐어. 그러다 보니 상대는 내가 소홀해지고 변했다고 생각했나 봐. 사실 그때 내 입장에선 복잡한 것들이 많았어. 집은 가난하고, 복학할 때 그런 문제들도 있었고. 미래를 어떻게 꾸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막연한…….

 그리고 그 다음에 잠깐 두 번째 여자친구를 만나게 되는데, 나보다 나이가 어렸어. 원래 그 친구를 굉장히 어렸을 때부터 봤는데, 나를 좋아했나 보더라고. 그래서 나를 따라 내가 다니던 대학까지 온 거야.    

  

나: 그냥 점수 맞춰서 간 건 아니고?

아빠: 그 친구 말로는 아빠가 이 학교에 있어서 따라왔다고 하더라고. 예쁘기도 하고 열심히 사는 좋은 친구였어. 나도 그 친구가 좋았어. 근데 그 친구를 중학생일 때부터 봤던 거라서 연인으로서가 아닌 그냥 귀여운 후배 같은 느낌으로 좋아했던 것 같아. 그때는 그런 부분을 착각해서 잠깐 사귀게 됐지.     


나: 아빠도 나쁜 남자였네. 

아빠: 어느 날은 그런 일이 있었어. 내가 라면을 워낙 좋아했거든. 라면을 많이 먹으니까 그 친구가 나한테 제발 라면 좀 그만 먹으라고 했어. 몸에 안 좋다면서. 그 말을 자주 했는데 나는 그 말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나 봐. 그래서 같이 식당에 가서 또 라면을 시켰어. 라면을 시키니까 화가 났는지 그 자리에서 그냥 나가 버리더라고.      


나: 그 여자분 안 따라갔어?

아빠: 음식이 나왔으니 먹어야 할 것 같아서 안 따라갔어. 근처 어디 있겠지 싶었는데 없더라고. 그러면서 ‘오빠는 내가 걱정해도 늘 무시한다,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지 않는다.’ 이러더라고. 그래서 한동안 라면 때문에 서먹했어. 그 뒤에는 내가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도 하고 정신이 없어지면서 더 신경 써 주지 못하고. 그러니까 오빠가 변했다면서 헤어지자고 하더라고.     


나: 그분은 아빠를 언제부터 좋아했는데 그렇게 된 거야?

아빠: 그 친구 말로는 중학생 때부터 나를 좋아했다고 하더라고. 끝까지 연인 비슷한 관계로도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사실 지금도 아는 사람이 겹치다 보니 우연히 경조사에서 마주칠 때가 있어. 네 엄마와도 아는 사이고. 근데 나를 보면 표정이 굳은 채 외면하려고 하더라고.    


나: 엄마랑 아는 사이라고? 설마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가?

아빠: 뭐?     


나: 엄마랑 아빠랑 결혼하기 얼마 전에, 어떤 나이 어린 아줌마가 엄마를 찾아왔었대. 찾아와서 ‘언니, 오빠랑 헤어지세요. 오빠는 언니랑 어울리는 짝이 아니에요.’라고 했다던데?

아빠: 아마, 그 친구 맞을 거야.     


나: 여기도 사랑과 전쟁이네.

아빠: 아빠가 처음 사귀었던 여자분은 정말 첫사랑이고 이성적인 감정으로 만났어. 그렇지만 두 번째 여자친구는 뭐랄까……. 그 당시 나도 어리다 보니까 그런 감정을 제대로 몰랐던 것 같아. 그냥 중학생 때부터 봐 온 친구에 대해 좋은 감정, 대견함. 이런 것들이었는데 이성적인 감정인 줄 알았던 거지. 착각했어. 사귀면 안 됐던 거야.   


나: 그분이랑 사이가 정리된 다음에 엄마와의 관계가 바로 시작된 거야?

아빠: 엄마와의 관계도 조금 애매한 게, 예전부터 호감은 계속 있었으니까. 시작을 어디로 봐야 할지 애매한 것 같아. 내 연애에서 시작과 맺음이 확실한 건 첫사랑 밖에 없는 것 같아. 군대에 간 것도 그분이랑 빨리 결혼하고 싶어서였고, 불꽃처럼 사랑했고.      


나: 불꽃? 아빠. 이거 나중에 엄마가 볼 수도 있어. 알지?

아빠: 이상한 얘기는 잘 편집해서 써 줘. 아빠를 너무 나쁜 사람처럼 표현하지 말아 줘.      


나: 알겠어. 근데 이해가 좀 어려워. 엄마랑 시작이 애매한데 어떻게 결혼까지 할 수 있어?

아빠: 아빠는 표현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지만, 엄마는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야. 그건 엄마한테 물어보면 되고. 

 시작이 애매하다는 건, 모든 게 자연스러웠거든. 어느 날 내가 놀러 가자고 제안하면 엄마는 ‘내가 너랑 왜?’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어. ‘어디?’라고 답했지. 그렇게 가깝게 친구와 연인 사이 중간 즈음에 관계로 지냈어. 함께 있으면 편하고 잘 맞고 결혼해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었어. 무엇보다도 신뢰가 가는 사람이었지. 그러다 내가 27살쯤 남산에서 사귀어 보자고 얘기했어. 그다음부터는 진짜 연인처럼 지내다 결혼하게 됐지.


 예전에 아빠에게 엄마랑 결혼해서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내 질문에 아빠는 이렇게 답했다. 가끔 엄마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엄마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고. 소녀일 때 환하게 웃던 모습, 노래하던 모습이 생각난다고. 그 순간이 떠오르면 '아, 맞아. 정미는 저런 사람이었지.'  하고 웃게 된다고 했다. 상대방의 순수한 어린 모습을 알고 있고 그 모습을 간직하고 살 수 있는 건 큰 선물이고 축복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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