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상처를 입었을 뿐
아빠는 예전부터 가끔씩 연애 이야기를 해 줬다. 반면 엄마는 그런 적이 없다. 내 연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만 봐도 엄마는 연애 경험이 많지 않은 것 같았다. 많은 사람을 만나는 걸 마치 죄를 짓는 일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간혹 아빠를 만나기 전에는 모태솔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나: 중학교 때까지 엄마한테 아빠는 그냥 키 작은 애였다고 했잖아.
엄마: 응. 왜 그렇게 작았는지. 아빠가 그때 160cm도 안 됐을 거야. 그래서 눈이 가진 않았지.
나: 그럼 엄마는 언제부터 아빠의 존재감을 느끼기 시작했어?
엄마: 혹시 아빠는 나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해?
나: 지금은 비밀이지.
엄마: 그래? 아빠랑 내가 뭘 한 건 없었지만, 주변 친구들이 ‘정선(아빠 이름)이가 정미(엄마 이름) 좋아한다고 했대.’라고 하더라. 그냥 소문이긴 했지만 그 얘기를 들으니까 정말 그래 보이더라고.
그 외에는 잘 모르겠어. 근데 소문에 우리보다 좀 어린 여자애가 하나 있었는데 그 여자애가 아빠를 좋아한다고 하더라고. 그 애가 아빠한테 찾아가서, ‘정미 언니는 오빠 잘 알지도 못하는데 왜 정미 언니 좋아해요?’라고 따졌다는 얘기도 들었어. 그리고 결혼할 때 나한테 찾아오기도 했고. 아무 사이도 아니면서 나한테 그러는 게 좀 웃기기도 했어.
이때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엄마가 말하는 그 어린 여자애가 아빠의 두 번째 여자친구니까. 게다가 엄마는 그 여자분과 아빠가 잠시나마 사귀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엄마한테 말해주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엄마, 사실 그 아줌마 아무 사이도 아닌거 아니래. 아빠랑 사귄 사이래. 그것도 엄마보다 먼저!'
나: 아, 그래?
엄마: 아무튼 그때는 그렇게 큰 관심이 없었어. 나도 대학 들어가서 사귀는 사람이 생기면서 교회를 잘 안 나갔거든. 그러니까 아빠랑 마주칠 일도 거의 없었지. 그때는 아빠도 여자친구가 있던 걸로 알고 있어.
나: 아, 대학 가서 남자친구 사귀었구나. 어떤 사람이었어?
엄마: 대학 가기 전까지는 집, 학교, 교회밖에 몰랐어. 근데 대학에 가니까 완전 신세계인 거야. 과대표까지 했어. 과대표를 하다 보니 학교에 안 나오는 친구 한 명에게 연락을 하게 됐거든. 연락만 하다가 어느 날 학교에 나와서 처음으로 얼굴을 봤는데 허우대가 멀쩡하고 괜찮은 거야. 그리고 나랑 종교도 같았어. 알고 보니 학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안 나오고 있었대. 근데 나랑 사귀게 되면서 학교에도 잘 적응하고 그랬지.
나: 오, 그 유명한 캠퍼스 커플이었구나! 나도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엄마: 맞아. 걔랑 나랑 수락산에도 많이 놀러 갔어. 다른 친구들이랑 가서 기타도 치고 게임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교회를 잘 가지 않게 됐지. 엄하게 자라서 그런지 이런 모든 것이 일탈 같고 재미있었어. 그 친구랑 있으면서 이렇게 재미있는 세상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 그렇게 학교에 다니다가 때가 돼서 걔도 군대에 갔어. 휴가를 꽤 자주 나와서 기다리는 게 힘들지도 않았고. 그렇게 지내다가……. 그리고……. 제대를 한 달 정도 앞두고 사고가 난 거야.
나: 무슨 사고?
엄마: 가스 사고였어. 제대를 한 달쯤 앞둔 언젠가 나한테 전화가 왔어. 부대 밖에 잠깐 파견 갔다 오면 휴가를 준다고 했대. 그래서 휴가를 받으면 나를 보러 오겠다고 전화했거든. 제대를 앞두고 있었으니 굳이 안 나가도 되는 건데, 그 전에 나를 한 번 더 보러 오겠다고 그렇게 파견을 갔어.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야외에서 자야 해서 굉장히 추웠나 봐. 근데 걔네 아버지가 군인이었어. 그것도 꽤 높은 군인. 그런 사람 아들이니까 간부들이 조금 따뜻한 곳에서 같이 자자고 했대. 근데 거기서 가스 사고가 난 거지. 거기서 자던 사람이 모두 죽었어. 부대가 난리가 났었대.
나: 설마 남자친구도?
엄마: 응. 처음에는 그렇게 된 줄 몰랐어.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도 연락이 오지 않아서 무슨 일인가 싶었지. 처음에는 휴가를 못 받았나 싶었는데 제대할 때가 됐는데도 연락이 없는 거야. 그러다 어느 날 우리 집으로 연락이 왔어. 사촌 형이라는 사람이 전화를 했더라고. 사고가 나서 죽었다고……. 나만 아니었으면 굳이 그런 파견 나가지도 않았을 테고, 휴가도 필요 없었을 텐데……. 그럼 그 사람 죽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자꾸 들더라.
나: 그 뒤로는 누군가를 만나기도 힘들었을 것 같아.
엄마: 그 뒤로는 연애를 못했어. 그러다가 아빠랑 결혼한 거야. 그동안 누군가를 만나려고 할 때마다, 남자친구가 나 때문에 죽었다는 생각이 드니 아무도 못 만나겠더라고. 미안하고 죄책감 들고. 남자친구가 나 때문에 그렇게 됐는데, 내가 누굴 만나면 안 될 것 같고. 행복하면 안 될 것 같더라. 그렇게 5년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지낸 거지.
이 이야기를 나눌 때는, 엄마가 엄마 같지 않았다. 꼭 엄마가 나보다 더 어린 동생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을 회상하고 그 순간의 기억을 내게 말해주는 모습에서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어린 대학생의 모습이 보였다.
나: 엄마, 엄마 때문에 그런 사고가 난 게 아니야.
엄마: 그지. 근데 그 때는 나 때문인 것 같았어. 내가 없었으면 굳이 제대 한 달 앞두고 휴가를 무리해서 받으려고 하지 않았을 거야. 난 그때 너무 충격도 받고 상처도 많이 받았어. 그 어린 나이에 사귀던 사람이 갑자기 죽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그 뒤로는 연애를 다시 시작하면 또 내가 무슨 상처를 받진 않을까 걱정도 되더라고. 어떤 식으로든 이별을 하게 되면 상처를 받게 되잖아.
엄마의 연애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동안 엄마가 나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는 첫 연애가 끝나면서 엄청난 죄책감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됐을 거고. 그런 엄마의 입장에서 내 연애는 위태롭고 우려스러웠을 것 같다. 오래 사귄 누군가와의 이별을 선택하는 내가 걱정스럽고, 얼마 되지 않아서 또 다른 (잠재적인 이별의 가능성이 있는) 연애를 빠르게 시작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과정을 지켜보며 나를 말리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엄마의 표현 방법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진 않지만, 적어도 엄마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그 마음은 알 것 같았다.
나: 엄마, 예전에 내가 다시 연애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했던 말들 기억나? ‘실패했으니까 기다려야 한다, 남자 없으면 못 사냐?’ 그랬잖아.
엄마: 그런 말이 너한테 많이 상처가 됐으면 미안해. 엄마는 네가 너무 걱정돼서 그랬어. 너는 한 번 큰 이별을 경험했잖아. 그러면 몇 년 정도는 너한테 어떤 선택이 좋을지 고민도 하고 걱정도 하면서 차분하게 만남을 기다렸으면 했거든. 근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하니까. 그 남자는 좋은 사람일지도 의심스럽고. 이러다가 네가 또 상처 받으면 엄마는 너무 힘들 것 같고. 그래서 그랬어.
나를 걱정해서 그랬다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말 괜찮다고. 그리고 그게 사실이다. 나는 정말 괜찮다. 지금까지 이별하는 것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가만히 있다가도 눈물이 나고 멍해지는 순간이 있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난 다시 잘 지냈다. 계속 바쁘게 잘 살다가 좋은 사람 만나면 연인이 되기도 하는 거고, 좋은 사람이 없으면 혼자 살면 된다. 오히려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는 것이 훨씬 더 힘든 일이다. 이런 내 얘기를 듣더니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첫 남자친구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 사고가 없었다면 엄마가 몇 번의 행복한 연애를 더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그 사고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엄마를 위로해 줬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아빠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