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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티제 Oct 24. 2021

엄마들은 참 대단하다.

아빠 얘기로 시작하는 엄마 얘기

 ‘엄마들은 참 대단하다.’는 제목을 걸고 말하기에 약간 이상하지만, 난 우리 아빠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정말 가정적이고, 우리랑 친구처럼 지내면서도 말에 무게가 있다. 환갑이 다 된 나이에도 정년을 보장하지 않는 사기업에서 임원을 하고 있다. 우리 아빠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 그 나이 아저씨들 중에 가장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멋진 사람이다. 또 얼마나 가정적인지, 회사에서 퇴근하자마자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넌다. 요즘엔 엄마가 10kg 대량 주문한 ‘안 깐’ 땅콩을 쪼그려 앉아서 까고 있다. 하루에 1~2시간을 쪼개서 운동도 열심히 한다. 그래서 지금도 180cm에 72kg를 유지 중이다. 


 엄마가 하는 얘기도 열심히 공감하면서 들어준다. 이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엄마는 똑같은 말을 엄청나게 반복하고 주어랑 목적어도 대부분 생략해서 대화하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분명히 아빠도 그 얘기를 듣기가 힘들 것이다. 그래서 엄마가 없는 틈에 아빠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 있다. 


 “아빠, 솔직히 엄마가 하는 말 듣기 힘들지?”


 질문에 암묵적인 동의를 하는 듯 아빠는 살짝 웃었다. ‘역시, 아빠도 엄마 말을 듣기 힘들었군.’이라고 생각하려던 찰나, 아빠가 말했다.


 “힘들 때도 있지. 그래도 들어줘야지. 아빠가 힘들게 할 때도 엄마가 견뎌줬으니까.”     




나: 엄마,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들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

엄마: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아빠랑 결혼한 다음 우리 집 형편이 많이 안 좋았잖아. 아빠가 갑자기 일을 그만두면서 한 10년 정도 암흑 같은 시기. 그때랑 출산? 그리고 우리 딸 결혼 관련된 일……. 그 정도?


나: 어릴 때 형편이 안 좋았던 거 기억나. 어린애였는데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거든. 

엄마: ‘사람이 이렇게 하고 어떻게 살지?’ 태어나서 이런 생각을 처음 했던 시기였어. 결혼할 때는 아빠가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아빠가 사업을 해 보고 싶다며 회사를 그만뒀어. 근데 일이 잘 되지 않았고 한 10년은 어려웠지. 정말 쌀이 없을 정도로 돈이 없었어. 뭐 먹고살아야 하는지가 걱정되는 순간들이 많았지. 


나: 그런 어려운 시기에 나도 태어나고 동생도 태어난 거네?

엄마: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너를 임신했어. 기쁜 일이긴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임신해서 ‘어머, 아직은 괜찮은데.’라는 생각을 잠깐 했어. 첫째 오빠랑 엄마랑 스무 살도 넘게 차이 난다고 했잖아. 큰오빠는 어린 여동생이 임신한 게 신기했나 봐. 원래 굉장히 과묵한 사람인데 몸은 괜찮은지, 병원엔 가 봤는지 이런저런 얘기를 묻더라고. 엄마랑 아버지도 엄청 좋아했어.      


나: 엄마가 몸이 굉장히 작잖아. 키도 150cm 정도고 그 당시 몸무게도 30kg대였다면서. 힘든 건 없었어?

엄마: 너무 힘들었지, 정말. 난 만삭 때도 40kg이 안 됐어. 너 태어날 때 3.2kg로 태어났는데 그게 내 몸에는 부담이었나 봐. 병원에서는 제왕절개 하라고 하는데, 어디서 애한테 그게 안 좋다는 얘길 들었어. 그래서 죽어도 자연 분만하겠다는 마음으로 너를 낳았어.      


나: 너무 위험했어. 그러다 엄마나 내가 죽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엄마: 그 시대에 아이를 낳다가 아이나 엄마가 죽는 일이 있을 거란 생각을 못했어. 근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니까 생각보다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이 가까이에 있더라고.       



 사실, 엄마가 말하는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은 다름이 아닌 우리였다. 지금 나에게는 남동생 정훈이 한 명뿐이지만, 사실 정훈이가 태어나기 전 나에게는 여동생이 잠깐 있었다. 여동생이 잠깐 있었다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쯤이었다. 그 당시 난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학업적인 측면에서 전혀 문제는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 성격은 너무 이상했다. 부모님한테 틱틱 거리기도 많이 했고, 물건을 건드리는 것을 지구 종말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지내던 중, 정말 어쩌다가(정말 왜 그 얘기가 나왔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냥 어쩌다가 듣게 되었다.) 한 살 터울 자매가 될 뻔했던 여자아이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는. 중학생에게 '죽음'이란 너무 생소한 것이어서 혼자 그 여자아이에게 정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세상에 보이지 않는 내 편이 한 명 더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낸 적이 있었다. 


 억울한 일이 생기면, '정은이는 나를 이해해줬을 텐데.' 하면서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나: 우리도 겪은 일이잖아. 정훈이 태어나기 전에 나한테 또 다른 동생이 있었는데 죽었잖아.

엄마: 정훈이가 그런 걸 묻더라. 자기 군대 갔을 때 많이 울었냐고. 그런데 엄마는 안 울었어. 왜냐하면 헤어지는 순간을 몰랐거든. 어디 들어가더니 나오지 않길래 아빠한테 물었더니 입대한 거라고 하더라고. 만약 이별의 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울었을 텐데 몰라서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어.

 아이도 마찬가지였어. 나는 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고 그냥 인큐베이터에 잘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러다 나중에서야 죽었다는 걸 알게 됐어. 내 눈으로는 한 번도 보지 못하고 그렇게 된 거라 오히려 그 순간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어. 대신 너희 아빠랑 할머니가 고생했어.     


나: 그게 무슨 뜻이야?

엄마: 둘째 아이는 8개월 만에 나온 거였어. 인큐베이터가 필요했지. 병원에 확인해 보니 인큐베이터가 있다고 했어. 그래서 난 일단 아이만 낳으면 건강하게 치료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러고는 아이가 1.4kg로 태어났다고 들었어. 그 이후로 좀 휴식을 취하고 있었지. 한참 동안 너희 아빠랑 할머니가 나타나질 않기에 아이랑 같이 있나 보다 했어.

 알고 보니 병원에 인큐베이터가 없었던 거야. 말이 안 되지. 병원이랑 싸울 시간도 없이 할머니랑 아빠가 아기를 데리고 다른 병원을 찾기 시작했대. 좀 큰 병원에 가 봤는데 거기도 없다고 하고, 결국 꽤 멀리 있는 병원까지 이동했어. 그 작은 아이를 안고 얼마나 괴로웠겠어. 도착한 병원에서 치료받다가 결국 죽었어. 살았다 해도 정상적으로 살 수 없을 거라고 하기도 했고…….     


나: 미친 병원 고소해야 되는 거 아니야?

엄마: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고소하진 못했지만 그 병원 지금은 없어졌어. 그때 아빠가 정말 많이 힘들어했어. 아이를 직접 봤으니까 아무래도 더 힘들었을 거야. 그때 아기가 딸이라는 것도, 어떻게 생겼는지도 다 아빠를 통해서 들었어.      


나: 근데 아이를 잃어 봤으면, 그 뒤로는 임신하고 아이 낳는 것이 겁이 났을 것 같아.

엄마: 그전까지 아이를 낳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그래도 너한테 형제자매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래서 셋째, 그러니까 정훈이 낳을 때는 조금 더 큰 병원에 갔어. 큰 병원에 가 보니 내 몸에 이상이 많이 발견됐어. 자궁에 문제가 있어서 조산 위험이 크다는 거야. 수술이 필요하다고 하더라. 경제적으로 조금 부담스러워서 수술을 하진 못했는데……. 고생을 정말 많이 했어.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애가 나오려고 해서 주사도 많이 맞고 계속 아팠어. 내가 너무 고생하니까 아빠도 그냥 아이를 포기하자고 했어. 그때 생각하니까 그냥 눈물이 난다.      



 엄마는 진짜 눈물이 나는 것 같았다. 목소리도 가라앉고 눈도 촉촉해졌다. 그때 생각하니까 눈물이 난다는 엄마. 난 그 눈물의 이유를, 몸이 너무 아파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게 아니란다. 혹시 아이가 잘못될까 봐, 사람들이 아이를 포기하자고 하는 것이 너무 서글펐단다. 왜 엄마는 자기 몸보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먼저인 걸까?


나: 수술도 못했는데 어떻게 했어?

엄마: 그냥 버텼지. 늘 누워만 있었어. 누워만 있는 데 애가 나오려고 해서 고생했어. 정말 처절하게. 병원에서 최대한 어떻게든 버티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기저귀 찬 다음에, 다리를 위로 올려놓고 줄 같은 걸 다리 사이에 끼웠어, 그리고 줄을 목에 감아 뒀어. 내 딴에는 아이가 나올 구멍을 막으려고 그런 거지. 그런데 아빠가 보기에 너무 처절해 보였는지 그냥 포기하자고 하더라. 아이가 나오더라도 어쩔 수 없을 것 같다고. 그 말이 엄마한테는 충격이었어. 엄마는 절대 포기할 생각 없었거든.


나: 정훈이가 9개월 만에 나왔지? 오래 버텼다.

엄마: 응. 굉장히 작게 태어나긴 했는데, 폐에 이상은 없었는지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더라고. 너 낳았을 때는 마음고생이 없었으니까 몸만 힘들었거든. 하늘이 노란 느낌. 그런데 정훈이 때는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어. 건강하구나. 인큐베이터에 들어갈 정도는 아니구나. 잘 버텼구나. 

 그리고 사실, 형편이 좋지 않을 때니까 인큐베이터에서 지내게 되면 그걸 부담하기도 어려웠을 거야. 듣기로는 하루 입원해 있는 것만 해도 꽤 비싸다고 하던데, 그걸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고민했어. 건강하게 태어나서 다행이지.     


나: 내 기억에 정훈이는 어릴 때 건강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엄마: 작게 태어나서 그런가……. 기절을 밥 먹듯이 했지. 그리고 먹는 게 벌써 달라. 넌 태어나자마자 우유를 80㏄를 마셨어. 시간이 갈수록 정말 많이 먹었지. 반면 정훈이는 10㏄도 제대로 못 마셨어. 잠도 못 자고. 너랑 정말 다르더라. 너는 모든 게 자연스러웠어. 우유도 얼마나 잘 먹는지 몇 번 들이키면 다 먹고 더 달라고 했어. 그런데 정훈이는 조금도 넘기지를 못하니까 저도 답답해서 울고…….      


나: 난 어릴 때부터 효녀였네?

엄마: 근데 넌 우유만 잘 먹었지, 유별나긴 또 엄청 유별났어. 혹시 기억나니? 아주 어릴 때 우리가 이사를 갔었어. 그래서 짐을 싸는데, 네가 그걸 정말 무서워하더라고. 그러더니 종일 우는 거야. 짐 싸는 동안 잠깐 옆집에 맡겨 뒀는데, 다시 집에 오니까 이삿짐 박스가 많을 거 아니야? 그걸 보더니 막 울더라. 어떻게 해도 울음을 멈추질 않았는데, 내가 업고 있을 때만 그치더라고. 아빠도 안 되고 내가 업어야만 눈물을 멈춰. 그때 이사 준비하느라고 정말 힘들었는데, 밤새도록 너를 업고 있었어. 자는 것 같아서 눕혀 두면 또 울고. 동네 사람들이 시끄러웠는지 애가 왜 그렇게 우냐고 묻더라. 내 생각에는 네가 짐을 보고 ‘엄마가 나를 어디다 버리려고 하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싶어.     


나: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만 키우고 싶다거나 한 적은 없어?

엄마: 당연히 그런 적은 없지. 가끔 때리고 싶은 적은 있었어. 내가 정말 아팠던 날이었나 봐. 너는 여전히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기였고. 그날따라 꼼짝할 힘도 없어서 누워 있는데 네가 화분에 있는 흙을 계속 집어먹는 거야. 시꺼먼 입을 하고 웃으면서 흙을 막 먹어. 그때 마음이 참 힘들었어. 그래도 넌 똑똑하고 잘 먹는 아이였어. 그래서 흙도 먹었나? 아무튼 하루에도 책을 20권씩은 읽어 달라고 했던 것 같아.     


나: 엄마랑 책 읽었던 거 기억나.

엄마: 그래? 현관 계단에 앉아서 같이 책 읽었잖아. 어릴 때부터 책 읽어 달라고 하고, 책도 스스로 보면서 글도 혼자 알고 그랬어. 원래 애들은 다 그렇게 크는 줄 알았어. 그런데 정훈이 보니까 그런 게 아니더라고. 네 동생 키울 때는 너랑 상황이 많이 달랐어.

 일단 정훈이는 기절을 너무 많이 했어. 어느 날 장난감에 부딪히면서 넘어졌는데, 갑자기 눈이 뒤집히더니 숨을 안 쉬더라고. 얼마나 놀랐는지……. 그때 한 번 기절하더니 그걸 4살 때까지 자주 그랬어. 한번 울기 시작하면 기절하고. 혹시 불편한 게 있으면 울고 기절할까 봐 늘 노심초사했지. 그것 때문에 네가 소외감을 느꼈을 거야. 그런데 엄마도 어쩔 수 없었어. 그때는 정훈이가 건강하게 살아 주기만을 바랐으니까.     


나: 정말 힘들었을 거 같아.

엄마: 정훈이 데리고 병원 갈 때마다, 의사가 고생했다고 했어. 엄마가 노력 많이 해서 몸무게가 조금씩 늘고 있다고. 그러다 네다섯 살 이후부터 기절은 하지 않았던 것 같아. 그전에는 정말 그때를 잊을 수가 없어. 자식 눈이 뒤집혀서 흰자가 보이고 얼굴도 창백하고……. 하루에도 몇 번 기절했으니까. 어느 날은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있는데 기절하더라고. 갑자기 애가 기절하니까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혼비백산했지.     


나: 병원에 갔을 때는 의사가 뭐라고 했어?

엄마: 큰 병원에서 주기적으로 치료받으면 좋았을 텐데, 그럴 형편은 아니었잖아. 여유가 있으면 계속 병원도 갔을 텐데. 병원에 가 봤는데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하더라고. 더 세심한 치료를 받아 보고 싶었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어쩔 수 없었어. 

 정훈이 임신했을 때 병원에서 수술 권유했다고 했잖아. 그것도 비용 때문에 못한 부분이 컸으니까. 수술비도 그렇고 수술 후에는 입원해야 했고. 또 엄마가 입원해 있는 동안에 너를 돌볼 사람이 없으니 사람도 구해야 할 거고……. 대충 계산해 보니까 병원비가 거의 우리 집 보증금 값이더라고.      


나: 할머니한테 부탁할 수 없었어? 

엄마: 내가 너를 낳은 다음에 할머니가 산후조리를 해 줬어. 내가 유일한 딸이었으니까 출산한 딸 몸조리해 주는 건 처음이었겠지. 당시 할머니는 이미 일흔이 넘었어. 할머니가 원래 하던 집안일에 이제 막 몸 푼 딸내미 수발까지, 이것저것 하는 일이 많아지잖아? 그러니까 할머니가 되레 나보다 아파해서 이틀쯤 지나니까 거동을 못하시더라고. 

 그렇게 아프면서도 할머니는 계속 ‘내가 60만 됐어도 너한테 더 잘해줄 수 있었는데.’라고 말씀하셨어. 하나밖에 없는 딸한테 뭐라도 더 해 주고 싶은데 몸이 따라 주지 않았던 거지. 그러니 정훈이 낳았을 때는 할머니한테 맡길 수가 없었어.      


나: 그랬구나. 엄마란 참 위대하다. 

엄마: 너 한동안 정훈이 갖다 버리라고 했던 거 기억나? 자주 아프니까 갖다 버리자고. 아마 그때 너도 힘들었을 거야. 엄마랑 아빠는 둘째도 죽었고, 셋째도 어렵게 낳아서 그런지 더 신경을 쓴 건데. 또 조금만 화내도 기절해 버리니까 오냐오냐 하면서 키웠던 건데 그게 너한테는 힘든 일이었을 거야. 그때 네가 그런 말 했던 거 기억나니?     


 엄마의 마지막 질문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어제 일처럼 너무나도 선명히 기억난다. 어릴 때는 동생을 참 싫어했다. 나의 엄마 아빠를 빼앗아간 작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지금은 세상에 동생이라는 존재가 있는 게 너무 좋다. 동생을 낳기까지 부모님이 정말 고생했지만, 힘들게 세상에 내 편을 하나 더 만들어 줬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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