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들어오는 책이 있다면 나가는 책도 있다. 서가 활용 효율화, 장서 질적 관리, 최신 자료 확보를 위해 1년에 한 번 장서폐기를 한다. 폐기할 장서는 이용 가치가 없는 자료, 훼손 및 파손 자료를 포함한 그 밖에 도서관법을 따른 기준을 근거로 한다.
이 학교도서관에 처음 왔을 때 서가에 비해 책이 넘치게 많았다. 서가 윗면부터 천장까지 책이 쌓여 있고 구석구석에는 책이 담긴 상자가 몇 상자씩 있었다. 학교도서관업무지원시스템(DLS)에서 조회하니 2005년부터 2013년까지 폐기 기록이 없고, 근무 첫해인 2014년은 나 또한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어 폐기를 못 했다. 다음 해부터 도서관법을 기준으로 한 폐기 범위 최대량인 평균 1,300~1,500권을 매년 줄기차게 폐기했다. 폐기한 자료는 나눔 행사를 하고 학급문고로 활용하거나 그렇지 못한 자료는 매각한다.
장서폐기 작업은 꽤 고되다. 천 권이 넘는 책을 선정하고 한 권씩 서가에서 빼 오는 일부터 목록 작성, 라벨 제거, 폐기인 날인 등 손이 많이 간다.
중학생 때였나. 어머니에게 도서관 사서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지인을 통해 사서 직업을 알아보시고 “그 일 너무 노동이더라. 책 옮기는 일을 맨날 하느라 손목도 매우 아프고 힘들단다.”라며 다른 진로를 선택하기를 바라는 눈빛으로 말씀하셨다. 폐기 작업을 할 때면 그때 그 말이 떠오른다. 그 일 너무 노동이더라. 손목은 물론 허리도 아프고, 비염이 있는 내게 책 먼지는 괴롭고 책 먼지 때문에 피부도 가렵다. 노동이 맞다.
폐기 대상 자료
라벨 제거한 폐기 자료
폐기 대상 자료를 선정할 때면 추억 여행을 한다. 최신성이 떨어지는 책 중 2000년대 초반 책들이 많아서 중고등학생 때가 생각나는 반가운 책들이 있다. 이 책이 나왔을 때 이런 일들이 있었지. 이 책은 고2 때 반 친구들이랑 돌려 읽느라 한 달을 기다린 책이었지. 이 책은 친구가 읽고 한동안 푹 빠져 있던 책이었지. 이 책 읽고 많이 울었지. 이 책은 수업에 필요해서 읽은 책인데 생각보다 재미있었지. 이 책은 과제 때문에 겨우 읽은 책이었지.
이지련 지음, 협객기(상상미디어, 1999)
초등학교 6학년 때 십 대들의 우상을 외치며 등장한 H.O.T.에 굉장히 열광했다. H.O.T.가 나오는 방송을 놓칠까 봐 텔레비전 앞에서 떠날 줄 모르고, 라디오에 나오면 녹음해서 목소리를 한 번 더 들었다. 친구가 방송 녹화를 하면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와 다시 보고, 앨범을 사서 듣고 또 들었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던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PC통신 소설들이 당시 유행했다. 소설을 올리는 사람도 여러 명이었고 소재도 그만큼 다양했다. 친구들끼리 모이면 어제 올라온 소설 이야기를 하고, 쉬는 시간이면 교실 컴퓨터로 소설을 읽곤 했다. 그 시기에 읽었는지 아니었는지 지금은 기억도 없는 통신 소설 중 《협객기》가 학교도서관 서가에 꽂혀있다. 표지 그림을 보자마자 나는 소녀로 돌아갔다.
오수연 지음, 가을동화(생각의 나무, 2001)
소녀로 돌아가게 하는 또 다른 책은 《가을동화》이다. 2000년도 고1, 우리 반은 연말 학교 축제에 낼 대표 작품으로 대형 모자이크를 만들었다. 교실 한쪽 벽면을 채울 만큼 큰 크기라서 교실 바닥에 밑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깔고 그 위에 엎드려 조각난 종이를 붙였다. 다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이면 바닥에 엎드려 있어서 지나가는 선생님들은 아무도 없는 줄 알았을 정도이다.
한 친구가 드라마 가을동화를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가져와 틀었다. 교실 바닥에 엎드려 종이를 조각내고 있던 우리는 드라마 배경음악 〈로망스〉가 나올 때면 미어캣처럼 허리를 세우고 일어났다. 어디선가 “오.”, “꺅.” 소리가 나면 화면에는 애정신이 나오고 있었다. 엎드려 있던 우리는 고개만 들고 그대로 멈춰 화면을 응시했다. 슬픈 장면이 나오면 한 손엔 가위를 한 손엔 풀을 들고 훌쩍였다.
이재운 지음, 칭기즈칸(해냄, 1998)
중학생 때 눈길이 가는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그 친구가 책을 반납하는 모습을 봤다. 평소 어떤 책을 읽는지 궁금했던 터라 반납대에 놓인 그 책을 바로 대출했다. 전혀 관심 없던 역사 소설이었다. 처음 읽는 역사 소설이라 어려울 듯했지만, 책은 술술 읽혔다. 늦은 밤까지 1권을 다 읽고 다음 날 2, 3, 4권을 대출했다. 어떤 까닭이었는지 기억이 없지만 4권 후반부터는 흐름이 끊겼다. 2, 3, 4권을 반납하고 5권은 대출하지 않았다. 나중에 읽겠다며 도서관을 나온 기억만 있다. 그 뒤로 아직 5권은 읽지 않았다.
오래되어 폐기한 책에 있는 도서 카드
옛 생각이 나는 책을 폐기할 때면 추억까지 폐기하는 듯해 마음이 아릿하다. 같은 책을 나도 읽고 너도 읽었으니 나뿐만이 아니라 저마다 추억이 서려 있을 텐데. 폐기당하는 도서관 책 운명이 참 서글프다. 폐기 책은 누군가 소장하거나 한낱 쓰레기가 된다. 도서관 밖으로 나간 책이 바람이 되어 나풀나풀 날아가 추억을 간직한 모든 이들에게 가닿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