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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원 Sep 12. 2024

마지막 희망

다음날 나는 정신이 몽롱한 채로 침대에서 깨어났다. 어제 조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욕조에 들어갔던 기억까지는 있지만, 그 후 언제 어떻게 침대로 와서 누웠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일시적인 기억상실이라도 걸렸던 모양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일찍 애국가가 흘러나왔고 곧 아침밥을 배식해 주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입맛이 없어 밥을 먹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이 독방에서 고독하게 지내다 조용히 세상을 떠나고 싶었다.


 초점 없이 흐린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았다.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얀 벽지에 새겨진 불규칙한 실선들만 보일 뿐 희미한 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불안정한 미지의 내 삶을 뚜렷한 구분 없이 하얀색으로 표현해 놓은 것 같았다. 천장 어디에도 내가 찾는 점은 없었다. 나는 한참을 천장만 응시하다가 지쳐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은 순간 내 머릿속은 암전이 되었다. 백색의 세계에서 암흑의 세계로 들어가자 여기서도 아무것도 안보였다. 나는 그대로 한참을 눈감고 있었다.


그러자 점차 청각의 세계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출소하는 사람들이 한껏 신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가면 뭘 하고 싶은지, 뭘 가장 먹을 건지 등 사소한 일상들을 이야기했다. 그들에겐 정말 소중한 일상일 것이다. 누구나 누리는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과 자유를 누리기 위해 목숨 걸고 넘어온 사람들이기에 그 일상이 누구보다 소중할 것이다. 그들의 목소리만으로도 그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제 나에겐 저들이 누리는 평범한 일상과 자유도 의미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흐르는 눈물은 좀처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삶의 의욕은 점점 암흑 속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 미지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나의 정신은 희미해졌다.

똑똑똑.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꿈속이라고 생각하여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하지만, 좀처럼 문 두드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 앉았다. 그때에서야 누군가 왔음을 알아차렸다. 몇 번을 노크해도 대답이 없자 문 열고 들어가겠다며 문에 키를 꽂고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서 나가자 대답이 없어서 놀랐다며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머리만 끄덕이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안내자는 조사관님이 찾는다며 조사실로 가자고 했다. 나는 왜 찾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물로 대충 세수만 하고 바로 조사실로 향했다. 힘없이 축 처진 나의 모습을 본 조사관은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말없이 머리만 끄덕였다. 조사관도 나의 심정을 눈치챘는지 다른 말은 안 하고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었다.

“소원씨, 낙태해 주기로 했어요.”

“정말요??”

나는 믿기지 않아서 다시 물었다.

“네. 마음고생 많았어요. 저도 얼마나 답답했는지 몰라요.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었으면 처음부터 해주고 싶었어요.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할 수 있게 돼서 정말 다행이에요. 수술 일정은 며칠 안으로 잡힐 거고요. 아마 원장님이 같이 가주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후련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생처음 하게 될 수술이 두려웠지만, 그 순간에는 그저 이제 살 수 있다는 안도감이 가장 컸다.

“국정원장님은 아무나 못 만나는 건 아시죠? 소원씨 이야기를 들으시고 원장님이 직접 수술할 때 같이 가주시기로 했어요. 이제 조사는 다 끝났고 수술만 잘 받으면 돼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수술 잘 받아요.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요.”

“감사합니다.”

정말 이대로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마지막 희망이 찾아온 것 같았다. 다시 세상을 돌려받은 느낌이었다. 회색빛 작은 독방에서 철저히 고립되어 이대로 내 삶은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삶의 의욕이 끝없이 추락해 더 이상 나의 삶은 복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런 나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이 찾아온 느낌이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가본 사람은 안다. 삶이란 여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하지만, 그 고통을 이겨냈을 때의 삶이야말로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 삶의 끝에서 그 말을 믿을 수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나의 선택은 늘 삶이었다. 하지만, 그 삶을 돌려받는 것엔 대가가 필요했다. 내가 피해자라는 증명과 나의 소신이 필요했다. 결국, 간절히 원한 결과 나의 소신대로 삶의 여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여, 현재의 나의 삶은 세상 누구보다 소중하고 감사하다”

죽음을 뒤로하고 또다시 삶이란 고통을 선택한 결과 또 한 번의 삶을 향한 희망의 빛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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