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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이 Sep 25. 2021

2장.열풍, 전국을 뒤흔든 캠핑

캠핑, 열풍이 아니라 문화가 되어야 한다.

캠핑 열풍, 언제부터였을까? 

2000년대 언제쯤 부터였을까!... 날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지속되어 나의 바램 처럼 단순한 열풍으로 끝나지말고 문화로 승화되어 팬데믹으로 모두가 힘들어하는 우리들에게 찾고자했던 희망들중에 하나가 되어주길 바랄뿐이다.


뒤죽박죽인 기억속, 2010년 전후하여 캠핑 열풍이 전국에 불기 시작했던것 같다. 

잠시 지나가는 바람일꺼라 생각했었는데 지금처럼 이렇게 대단할지 예상하지 못했다. 

전국 어디든 가는 곳 마다 캠핑족들의 차량으로 도로는 붐볐고 텐트로 캠핑장은 만원을 외치고 있었으며 도시 근교뿐 아니라 섬마을까지 캠핑을 즐기는 사람들로 전국의 산과 들 그리고 바다는 들섞거렸으며 캠핑장 예약은 필수가 되었다. 팬데믹으로 인해 조금은 주춤하였겠으나 캠핑 열풍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2020년 팬데믹이란 불청객의 방문이 있기전, 우리 가족은 자주 캠핑을 다녔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느긋함이 좋았고 주변과 소음으로 섞이는 것도 즐거웠고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이 많은 여유가 좋았을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가족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더 좋았다. 

느림을 통해 잠시나마 자신을 내려 놓을수 있었고 여유를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으며 더불어를 통해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느낄수 있었다. 이 맛이 캠핑이었고 이 맛을 찾고 즐기기 위해 주말이면 나와 우리가족은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찾아 길을 나섰으며 그렇게 우리 가족에 선사된 최고의 호사와 특권을 자연이란 이름을 빌어 누릴수 있었다.


90년대 추억속 여행.

1990년, 이 숫자에서 사람들마다 떠올리는 기억은 각기 다를 것이다. 

 기억들 속엔 수많은 이야기가 있겠지만 당시 나의 전유물처럼 여겼던 여행이야기 하나를 꺼내려고 한다.

 

<<1990년, 어떤 모습의 여행을 기억하는가?>>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어렸을적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로망을 가슴에 묻었던 것일까? 

직장생활을 갖 시작하고부터 틈만나면 전국을 배당 하나 메고 미친듯 다녔던 기억은 조각난듯 드문 드문 난다. 


1990년 여름날, 무거운 배낭과 땡볕에 달궈진 도로와 씨름하며 하루에 6시간이 넘는 시간을 4박5일 이라는 짧은 휴가기간에 맞추기 위해 울릉도를 걷고 있었다. 버스보다는 도보 일주를 선택하였고 제조사를 알아볼수 없는 배낭과 묵직한 텐트 하나 그리고 온갖 용품을 넣고 뜨겁게 달궈진 도로위를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텐트와 먹거리를 모두 배낭에 넣었더니 배낭의 무게만 족히 10KG 이상 넘을 것으로 몸은 기억하고 있는듯 싶다. 당시 울릉도의 도로 사정은 다른 곳과 매우 달랐는데 여름 한 낮이지만 바다로 사면이 둘러쌓인 덕일까! 도로는 걸을만 했으나 산 허리를 돌아 오르막과 내리막이 연속되었고 걷기보다는 네발로 기었을 만큼 경사도는 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군인들 산악행군이 이보다 더할까! 싶을 만큼 급경사였다. 

다행인 것은 도로 어디든 바다가 보였고 아침, 저녁으로 보여지는 안개와 노을은 감탄만 하기엔 부족함이 넘쳤고 힘겹게 걷던중 만났던 마을과 이웃은 정이 넘쳤다.  

물이 풍부했던 울릉도는 곳곳에 용수로와 같은 개울이 있어서 데워진 몸의 열을 식히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발닿는 곳에 텐트치고 바라본 바다와 산의 경치는 TV광고에서나 봄직한 풍경이었다. 

당시만해도 도로는 2곳으로 나누어져 있었기에 버스로 일주는 불가능하였지만 그나마 걸어서 섬 전체를 한바퀴 돌수 있었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배낭 하나 맨 나는 많은 곳을 다녀봤지만 이곳 만큼 힘든 곳은 없었을 것이나 나중에 다시한번 찾고 싶은 곳중 한 곳이 울릉도가 되었다. 

나만의 캠핑으로 원하는 곳 어디든 돌아다닐수 있었고 그곳에서 사람들의 만날수 있었던 것은 모르는 사람이지만 사람들간 거리가 없었고 서로를 배려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왜 그토록 돌아 다녔을까?>>

20대, 직장생활을 막 시작한터라 주머니사정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기에 여행을 좋아했던 20대에 도보로 전국을 돌아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무엇이 그토록 돌아다니게 만들었을까? 

사실 특별한 사유는 없었던것 같다. 

처음엔 남들이 가보지 못했던 곳을 다녀보자는 생각이었고 나중든 생각은 시작했으니 그냥 계속하고 싶었던 것 같다. 여행에서 남과 다른 나를 느끼고 여행의 허전함이 20대 빈곳을 채워주었기에 좋았던 것 같다. 

더운 여름날 내리쬐는 햇볕이 좋았고...

속을 알수없는 짚은 초록의 여름바다가 좋았고...

 빈것 같은 추운 겨울날이 좋았고...

앙상해진 나무에 핀 상고대가 좋았고...

누구도 밟지않아 소복하게 눈 덮힌 산이 좋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무작성 걷기 또한 너무나 좋았고... 

봄이 오면 꽃을 찾아 남도지방으로 걸음을 옮겼고...

가을이면 단풍따라 계곡을 찾았으며... 

겨울엔 눈을 찾아 유명산 정상을 찾아 헤멨었다.


그렇게 배낭 하나 메고 틈날 때마다 전국을 돌아다녔던 젊음날들, 기억은 군데군데 가위질 당하듯 짤려나갔지만 기억할때 마다 그 시절의 느낌은 진한 향수처럼 그때 냄새가 새롭게 느껴진다.

어느 해 겨울산, 산을 많이 찾는 사람들이 간혹 경험한다는 일이 내게도 생긴다. 

지리산에서 만났던 사람을 설악산에서 만났고 다시 태백산에서..만났다.

불과 2개월도 안되는 시간동안 같은 사람을 국내 유명산 정상에서 마주친 것이다.

산을 좀 다닌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내게도 생긴 것으로 보아 남들이 흔히 말하는 여행에 미친 사람이 되어 있었던것 처럼 그렇게 젊은날들을 시간 가는줄 모르고 돌아다녔던 것 같다.


그랬던 20대 시절엔 지금처럼 인터넷이 없어 온라인 카페와 같은 기억은 없다. 

오프라인 동호회는 전문적인 산악인들의 활동영역이었기에 단순 관심자였던 나 같은 사람은 요즘처럼 동호회 활동이 어려웠을뿐 아니라 틈 나는대로 여행을 했던터라 정기적인 활동은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내가 그러했듯 당시에 나 홀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새해 벽두를 앞두고 몰리는 곳이 정해져 있었다.

1월1일 일출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해맞이로 유명한 바닷가라면 어디라고 할것 없이 해변가 모래사장엔 자리를 잡았고 인파들로 발디딜틈이 없을 만큼 북적거렸다. 이는 바닷가뿐 아니라 유명산 정상도 매 한가지였다.

일출로 유명한 겨울산중 지리산 천왕봉 일출을 보기위해 전날밤 세석대피소엔 진풍경이 벌어진다.

한정된 인원밖에 수용할수 없는 대피소엔  밤 늦게 도착한 등산객들로 발디딜 틈 없었고 숙소를 잡지못한 사람들은 대피소 주변에 텐트를 치거나 바람만 피할 곳을 찾아 비박을 하였다. 

단체도 많았지만 2~3명 혹은 나 처럼 홀로 산을 타는 사람들로 한겨울 겨울산 정상은 낮선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던 기억이 새롭다. 

요즘도 그럴까? 그 수는 대피소 주변을 걸어다니지 못할 만큼 많았으며 하룻밤 비박하는 사람들의 랜턴 불빛과 밤 늦도록 웅성거림은 대피소 주변에 가득하였고 다음날 힘겹게 새해를 맞은 이들의 일출은 말 그대로 장관이 아닐수 없었다. 그렇게 숫한 낮과 밤을 산과 바다에서 보냈으며 쉘수 없을 만큼 많은 계절을 낮선 거리에서 보냈다. 봄,여름, 가을, 겨울을 구분했던 계절은 즐거운 여행자에게 크게 의미는 없었다.


90년대, 시골 인심은 그대로였다.

부족함이 많았던 나의 유년시절인 70, 80년대에 비해 많은 변화로 달라지고 있던 90년대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언제부터 였으며 어떻게 였는지 모르지만 캠핑에 대한 아주 작은 로망 때문이었을까!

90년대, 취업을 한후 시간이 될때마다 배낭과 텐트를 꾸리기 시작하였고 어느새 거리를 걷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너무 궁색한 대답>>

요금 같은면 유튜브 혹은 페북 또는 인스타에 글을 쓰기위해서라든가! 아니면 젊을때 사서 해고픈 고생이라든가! 조금은 그럴싸한 이유를 붙였겠지만 당시 20대에 거리를 걷게 된 이유는 특별할 것이 없었던 것 같다. 

그냥 남들이 가보지 않은 곳을 다녀보고 싶은 욕구였거나 자신도 알지 못했던 취미였던 것쯤이 아닐까! 싶다.


20대에 관심사는 어떻게 먹고 살것인가? 어디를 여행할 것인가? 단지 그 생각뿐이었던것 같다. 

그래서 스스로 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니 허락된 여건속에서 여행하는 것이 그냥 좋아서라는 변변찮은 답외에 특별한 것이 없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를 잘 모른다는 것이 출발점이었고 그래서 곳곳을 다녀보고 싶다는 것이 이유의 전부였으며 여행의 시작과 끝을 정해놓지 않았기에 언제든 어디든 내 편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은 직장생활에 맞혀 가다 서다를 반복하였고 싸구려 배낭과 2~3인용 텐트 그리고 너무나도 볼품없는 코펠과 가스 버너 그리고 지인에게 얻은 침낭은 부족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갈수 없는 곳은 없었다.


당시 지금과 비교해보면 불편했던 교통과 숙박 그리고 주머니 사정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중교통으로 목적지에 도착하면 건강한 두 다리가 있었기에 걷고 또 걸었다. 

지리산도 걷고 태백산도 걷고 울릉도도 걷고 제주도도 걸었다. 그러다보니 여행인지 방랑인지 구분할수 없는 행색으로 전국 어디든 다녔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날 목포에서 시작된 여행은 완도, 해남을 거쳐 여수, 통영, 거제를 통해 부산으로 긴여정의 여행이 시작되었고 시간을 줄이기 위해 밤세워 걷고 또 걸어야 했으며 그러다 밤이되면 발닿는 곳 어디든 가리지않고 몸을 뉘우고 잠을 청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앙상하게 골조만 남은 짓다만 건물에서...

비워둔 지 오래된 폐가에서...

마을에 있는 정자에서...

바닷가 앞 항구에 올려놓은 배에서...

장소가 어디든 크게 게의치 않았다. 작은 텐트 하나 피고 눈과 비 그리고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잠에 골아 떨어졌다. 


<<불편할텐데 어떻게 여행을 계속하느냐?>>

친구의 말이 기억난다. 

하지만 힘겹게 걷고 난 뒤 잠은 꿀보다 달았고 무사히 도착한 기쁨과 성취감은 있어 불편함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던것 같다.

요즘처럼 잘 만들어진 캠핑장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캠핑 혹은 텐트 금지란 말도 어디에도 볼수 없었으며 국립공원 캠핑장이 아니라면 돈 받는 곳도 쉽게 볼수 없었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그런 곳이 있었다해도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이용은 어려웠으며 있었는데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찾을수 없었거나 있다해도 기억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끝이 없을 도로위를 정해진 시간을 맞추기 위해 시간에 쫒기듯 걷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알게된 것은 한 여름 뜨거워진 도로위를 걷는 다는 것은 추운 겨울 도로 위를 걷는 것보다 좋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 같다.


당시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없던 시절, 휴대폰에 디카는 당연 없었고 필름카메라는 있었지만 사진기가 없던터라 보이는 모든 것을 잊지 않고 기억에 새기겠다는듯 눈과 마음에 힘주어 하나 하나 기억하려고 했다.

돌이켜보면 당시는 몰랐으나 현재 생각해 보니 상상할 수 없던 노숙을 여행을 빙자하여 했던 것 같다. 

넉넉하지 않았던 주머니 사정에도 불구하고 여행 할 수 있었던 것은 90년대까만 해도 시골 인심은 배낭을 멘 낯선 여행자를 멀리하지 않고 밥 한그릇 내어줄 수 있는 넉넉한 인심은 그대로 였기 때문이다. 


전국 어디를 가든 시골 인심은 여행자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기에 큰 돈 없어도 오랫동안 여행하는 것이 가능했다. 여행이 계속되면서 거지꼴의 몸은 지쳐가고 있었지만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시골 인심은 밥 한그릇과 된장 한 숟가락 속에 녹아 있었고 동냥하듯 여행했던 시절의 감성은 지친 몸과 다르게 풍성하게 채워지기 일쑤였다. 밥 한그릇 된장 한 숟가락 내어주시던 어른들의 모습과 냄새까지 하나 하나 꺼내어 되새김하는 내내 마음 한켠은 훈훈하게 추억으로 데워졌다. 그렇게 여행하는 내내 사람들의 온기로 채워졌던 풋풋한 정은 나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나와 비슷한 여행자가 많았기에 그들 또한 얼굴도 모르는 이웃의 풋풋한 정을 함께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빠르게 흐른 시간속에 정신없던 나의 여행은 2000년대를 맞았으며 힘껏 졸라맸던 허리띠를 서서히 풀게 되면서 생활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였으며 새로운 모습의 여행을 만나게 된다. 

바로 캠핑이었다. 

2010년 전후해서 캠핑은 전국으로 열풍은 확산되었고 이후 캠핑과 여행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며 분명 이전의 여행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캠핑, 열광하는 대한민국

유년시절 부족함이 많았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가 보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유년시절의 브랜드 달린 텐트와 캠핑장비는 누구랄것 없이 갖고싶은 것중 하나였다. 지금은 흔하지만 그땐 많은 사람들이 모여 구경 할 만큼 귀했고 소유 할 수 없는 것중 하나로 나와 너무 멀리 떨어저 있었기에 유년시절의 캠핑은 내 자신도 알지 못한채 특별한 로망으로 기억된듯 싶다. 

이후 시간은 빠르게 지났고 새롭게 맞은 2000년대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으로 급하게 달리고 있었다. 


<<한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낮선 세상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캠핑을 하고, 

서핑과 카약을 즐기고 백패킹을 하며 개인방송을 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유년시절의 바다의 모습을 지나 20,30대 시절에 전국을 여행했던 모습과는 상상 할수 없을 만큼 달랐고 전국은 캠핑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어쩌다 캠핑나온 사람들로 가는곳 마다 북적거리기 시작하였다.  


2009년 1인당 국민총소득(GNI) 2만불시대로 접어들면서 일반 산업군의 성장은 내수시장에 큰 변화를 일으게 되었고 이윽고 국내레저산업에도 성장의 변화를 맞게 된다. 이후 국내 대부분의 산업은 유례없는 성장세가 이어지고 내수경기는 호황을 맞았으며 2014년에 접어든 한국경제는 실질적인 성장시대로 평가를 받을 만큼 거침없는 성장세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국내레저산업의 성장세는 아웃도어 등 관련 업종으로 확대되었으며 특히 온라인 카페와 동호회를 전문적으로 활성화시켰다. 그러한 영향으로 국내캠핑산업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캠핑인구의 저변 확대라는 탄탄한 소비시장 인프라를 구축하게 되면서 전국은 캠핑과 더불어 캠핑카 열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이후 우여곡절로 시간은 좀 걸렸지만 2018년 말에 국민총소득 3만불시대가 열리게 되면서 캠핑산업은 한층 더 큰 관심으로 주목 받게 되었으며 차박, 카라반 등 캠핑카관련업종은 대형화 고급화로 거침없는 성장세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게 된다. 

부족함이 많았던 70,80년대를 지나면서 조금은 나아졌다지만 그래도 부족했던 90년대까지만해도 국내캠핑인구는 미비하였으나 2010년을 넘기면서 60만명 수준으로 증가 추세를 보였고 이후 가파른 상승세가 이어지면서 2016년에 500만명시대를 열면서 폭발적인 증가세로 전국은 캠핑의 도가니라해도 부족할 만큼 캠핑 열풍은 팬데믹 이전까지 급한 상승세를 보였으며 이후에도 조금 주춤하고 있으나 관심은 지속되고 있다.   


최근 바닷가 풍경은 유년시절에 보던 바닷가 풍경과는 상상하기 힘들만큼 변해 있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캠핑장에는 고급캠핑카 또는 카라반을 주차하거나 아니면 발코니가 달린 넓은 텐트 한 동을 세우고 웨슈트를 입고 서핑보드을 즐기는 레포츠매니아들로 바다는 계절을 잃었다. 또한 캠핑족들로 붐비는 캠핑장은 그곳이 바다든 강이든 구분없이 팬데믹시대에도 잠들지 못하고 사람들의 목소리도 가득하다. 캠핑장 예약은 필수가 되었고 경치 좋은 캠핑장은 길게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는 등 북쇄통을 이룬지 한참되었다. 그렇게 계절을 잃어버린 바다와 강 그리고 산 등 봄부터 겨울까지 사람들로 북쩍이며 전국 어디든 캠핑을 즐기는 사람들로 캠핑장은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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