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힘들 땐 언제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혼하고 2년쯤 지났을 때부터 조금씩 시작된 것 같다.
아내가 육아에 지쳐 힘들어할 때 나는 나름대로 도와준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많이 싸웠던 시절.
아내와 시어머니와의 갈등으로 인해 부부싸움이 잦았던 시절.
직장에서는 매번 승진에 누락돼서 힘들었던 시절.
그때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나를 외면하는 아내였다. 좀 지나친 말이라면 나를 부정하는 아내였다. 내 마음과 내 몸을 거부하는 아내였던 것 같다.
나는 그런 힘든 시기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힘든 시기를 타개하려고 내가 제일 먼저 시도했던 건 술이었다.
처음에는 한두 잔 먹기 시작했던 술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술을 마시는 비용으로 지출되는 돈이 너무 많아지는 것이었다.
순간의 힘듦과 괴로움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긴 했지만 너무나 많은 비용 감당이 두려웠다.
심지어 마이너스 통장까지 만들어 놓고 대출한 돈으로 술을 마시고 다녔었다.
나는 나의 힘든 순간을 술로서 해결하려 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더 이상 금전적인 지출을 하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이 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이너스 대출도 정점을 찍고 나는 그때부터 특별 보너스나 현금으로 받는 돈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 대출을 줄여갔다. 그리고 부족한 금액은 나중에 퇴직할 때 퇴직금으로 충당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런 부분에서는 나는 아내를 철저히 속일 수가 있었다.
집에는 급여 명세서를 PC로 수정한 것으로 가져가고 회사에서 급여가 들어오면 별도로 만든 통장에 급여인 것처럼 다시 재입금을 하는 식이었다.
뜸해지면 술집의 마담이 연락을 해서 처음 얼마간은 냉정하게 발을 끊기가 어려웠지만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이때부터 나는 영화 보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시간만 되면 영화를 보러 갔다. 저녁에 퇴근하기가 무섭게 영화관에 가서 영화표를 끊어놓고 순댓국 등으로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같은 날 저녁에 두 편을 보기도 했었다.
울고 웃고 같이 슬퍼하고 위로하고, 영화는 내 인생의 힘든 시기를 견디게 해 준 한 명의 인격체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도 집에는 일찍 들어가기가 싫었다. 그때부터 밤거리를 방황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길을 걷다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따라가서 말을 걸어보는 식이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미친 사람 취급하거나 불한당 취급을 하며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도망치듯이 지나쳤다.
난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말 몇 마디 하며 나의 고민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인데, 게 중에는 화를 내며 욕을 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 내 기억으로는 3명 정도 되었던 것 같은데 진짜 몇 분 동안 같이 걸으며 대화를 해주는 사람도 있었고, "성의는 고맙지만 괜찮습니다."라며 친절하게 사양하며 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에 나와 몇 분을 걸어가며 대화를 해준 그 녀, 아마 내가 배회하던 길이 신풍역쯤이었을 텐데 택시도 안 잡히고 버스가 떨어져서 동작구까지 걸어간다고 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녀와 헤어진 후 내 차를 세워둔 자리까지 되돌아 뛰어 와서 내차로 그녀를 동작구까지 태워다 주려고 다시 되돌아가봤으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고맙다. 누군지도 모르고 다시 봐도 기억할 수 없는 얼굴이지만 나에게 따뜻하게 말해주며 걷던 그녀가 정말로 고맙다.
아마 나는 이때부터 사진을 찍어서 Instagram에 올리는 것도 시작했던 것 같다.
하나의 취미가 생기니까 어떤 고민이나 슬픔이 있어도 이겨내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나는 Instagram에는 지금까지 1만 개 넘는 피드가 올려져 있다. 내가 슬프고 기쁠 때 바라본 하늘 그런 자연의 풍경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때부터 책을 조금씩 읽기 시작하는 습관을 들였던 것 같다. 독서를 하면서 나는 마음의 안정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사랑을 한다.
술과 여자에 사랑을 빠지기도 하고,
영화에 사랑을 빠지기도 하고, 음악에 사랑을 빠지기도 하고, 사진에, 책에,
세상에 뭐라도 하나쯤은 사랑하는 것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도 좋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으면서 공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시기가 오더라도 잘 견뎌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방황할 때 자주 다니던 술집에서 내 푸념에 잘 호응해 주던 마담과 아가씨들 내가 길에서 만나 대화를 시도해 보던 사람들, 내가 보아 온 영화들, 읽어 온 책들,
이 모든 것들이 내 인생의 한 편에 간직해 있는 조그만 아주 조그만 사랑이었지 않을까 싶다.
가끔 그 순간과 그들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