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좋아하는 후배가 생겼다.
내가 자기에겐 제2의 아빠란다.
처음에는 그냥 어리고 귀여운 후배라서 잘 챙겨주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그 아이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여기서 좋아한다는 의미는 이성 간에 좋아한다는 의미보다는 직장 선배로서 연장자로서 좋아한다는 의미가 더 가깝겠지만 왠지 모르게 그것만은 아닐 거라는 느낌도 강했던 것 같다.
점심시간이면 구내식당에서 나랑 식사시간을 맞춰 같이 먹으려 애를 쓰고 점심을 먹고 나서도 같이 차라도 한잔 하려는 그 아이의 마음이 보였다.
차를 마시며 공원을 산책하는 시간도 잦고 둘이 같이 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어느 순간 나에게도 직장 후배인 그 아이를 이성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위험하게도 사귀어 보고 싶다는 감정이 어느 순간부터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아이는 자기가 하는 일에 참 열심이고 모든 업무를 규정에 입각해서 하는 딱 부러진 아이였다.
그렇지만 같은 또래의 여직원 두 명이 자기들과는 입사 전형이 다르게 들어온 이 아이를 배타적으로 대하며 따돌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에 나는 그렇게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의 마음을 조금씩 보듬어주기 시작했던 것 같다.
직장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면 공감해서 들어주고 해결해주려 했고 너무 민감하게 대응하지 말라며 조언해 주기도 하고 그들에게 먼저 가까이 다가가 보라고 얘기해 주기도 했었다.
그 친구는 나에게 많이 의지하는 것 같았다.
일찍 퇴근해도 되는데 가끔은 내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잠시 얘기만 하다가 헤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나는 내가 속한 조직에서 누군가를 따돌림하는 사람들을 굉장히 싫어한다.
그렇다고 해서 왕따를 시키는 사람들이 무조건 잘못됐다고 단정 지어서 나무랄 수는 없는 것이다.
쌍방 간에 잘못이 있을 수도 있고 남들은 모르는 사연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는 자기를 왕따 시키는 아이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할 얘기가 있다며 나에게 저녁에 시간을 좀 내달라고 했다.
그 아이는 6시면 퇴근할 수 있는데도 내가 일 끝나기를 기다려 우리는 커피숍도 아닌 사무실 근처 벤치에서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그렇게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그 친구가 우는 것이었다.
직장생활이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다.
자기가 우울증 증상도 생겨 현재 인사전문가에게 상담도 받고 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나는 이런저런 위로의 말을 해 주었던 것 같다.
그때 그 아이가 눈물을 흘릴 때 왜 한 번도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했을까!
그게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혹시 남들이 볼까 봐서,
남들의 눈과 소문이 두려워서 그랬을까?
그 이후로도 우리는 점심시간에 같이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며 집안 얘기 동생 얘기 부모 얘기도 하며 그 아이와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인사이동을 하게 되었다.
그 아이만 혼자 덩그러니 외로움과 싸우게 남겨두고 인사이동을 하게 된 것이었다.
내가 그쪽 지점에서 근무하는 마지막 날 그 아이는 퇴근하지 않고 밖에서 내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그날도 그 아이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우리는 어두워질 때까지 얘길 하다가 그 아이에게 내가 먼저 집에 바래다준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내 차를 타고 그 아이의 집 근처로 갔다.
그 아이는 자기네 집이 저기라고 손짓하며 알려 주었다.
근처 음식점에서 아마 순댓국으로 저녁을 먹은 것 같다.
그리고 우린 주변을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아쉬워하며 헤어졌다.
나는 그 아이에게 먼저 들어가라 하고 그 아이는 내가 먼저 출발하라 하고,
(갑자기 초등학교 때 훈상이라는 친구와 놀다가 그 친구가 나를 바래다주면 나는 또 그 친구를 바래다주고 그러다가 중간에서 헤어진 것처럼 애틋하게)
그렇게 마지막으로 헤어진 후에도 그 친구는 저녁을 먹자며 자주 연락을 해왔었다.
처음엔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직원과 단둘이 그것도 이성 간에 저녁을 먹는 것이 부담이 가서 망설였지만 자꾸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 드디어 어느 날 저녁 지하철 신도림역에서 만나 우린 보쌈집에 들어가 약간의 맥주도 마시며 저녁을 먹고 건너편 건물에 있는 야외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이 좀 불어서 그랬는지 야외에는 다른 손님들 한 팀만이 멀리 떨어져 있길래 우린 작게 노래도 부르고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그 아이는 아쉬워하는 빛이 역력했지만(사실 나도 헤어지기가 아쉬웠다) 시간이 흘러 우린 다시 신도림역에서 헤어지려는데 그 아이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
이번엔 내가 두 손으로 그 손을 잡고 놓기가 싫어 잠시 동안 서 있었다.
그때 왜 그 손을 놓지 않으려 했을까?
얼마 전에는 자기가 결혼을 한다고 꼭 와 달라는 전화가 왔었다.
나는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 초라한 내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그리고 사실은 내가 너를 좋아했다는 감정을 숨긴 것도 마음이 걸렸다.
그래서 가지 않고 축의금만 보냈다.
결혼한 이후로도 그 친구는 자기가 하는 취미 활동 동영상을 보내주기도 하고 저녁을 먹자고 해서 또 한 번 저녁을 먹은 적이 있었다.(그땐 같이 근무했던 다른 직원을 내가 불러내 셋이서 저녁을 먹었다)
아직도 가끔 무슨무슨 기념일에 이모티콘을 보내주는 그 아이,
내가 해준 것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을 나에게 주려한다.
요즘은 그 아이에게 내가 먼저 전화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실 나는 내가 미혼이었다면 그 아이를 더 잘 챙겨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먼저 더 가까이 다가갔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