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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검사 Feb 19. 2022

고전(古典)적인 고전(高專) 유도

나의 보잘것없는 유도 이야기 6

내가 일본에서 유도를 하면서 놀란 점은 일본에서는 아직도 여러 가지 유도 규칙이 공존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유도는 모든 시합이 국제유도협회(IJF) 규칙을 따라 이루어지는데 비해 일본에서는 아직도 크게 세 가지 규칙이 공존을 하고 있다.


그중 첫째는 일본인들이 유도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으로 생각하는 강도관(講道館, 일본어로는 코도칸) 규칙이다. 이 '강도관'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 19세기말 가노 지고로(嘉納治五郞)가 세운 곳으로 전국에 흩어져있던 여러 가지 유술(柳術)을 통합하여 근대 유도가 만들어진 곳이다. 이 강도관에서 제정한 규칙을 강도관 규칙이라고 하며 일본 국내 시합에서는 대부분 이 규칙으로 시합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올림픽과 같은 국제대회에 사용되는 국제유도협회(IJF) 규칙이다. 일본 내에서 국제대회가 펼쳐질 경우 IJF 규칙에 따라 시합이 이루어진다. 사실 강도관 규칙과 IJF 규칙은 내가 운동을 하던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큰 차이가 있지는 않았다. 그나마 눈에 띄는 점은 일본 국내 대회에서는 청색 도복을 입지 않고 흰색 도복만 착용한다 정도였다(그 외에도 굳히기 시간, '효과' 점수의 유무 등이 다르긴 했다).


그런데 한동안 유도를 보지 않다가 작년 올림픽 때 보니 IJF 규칙은 놀라울 정도로 많이 바뀌어 있었다. 경기장 모양(장외를 표시하는 빨간 매트가 없어짐), 경기 시간(4분으로 단축), 득점 방식(한판, 절반만 인정), 부심(더 이상 의자를 놓고 앉아 있지 않음), 굳히기 시간(20초가 한판) 등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래도 이 두 가지 규칙들은 바로 아래 언급되듯, 선 기술(메치기) 위주로 진행이 된다는 큰 틀은 동일하다.



마지막 세 번째 규칙은 고전유도(高專柔道) 규칙이다. 여기서 말하는 고전은 오래되었다는(古典) 뜻은 아니고 옛날 일본 교육체계 중 대학교에 해당하는 '고등전문학교'에서 주로 행해진 유도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이 고전유도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유도와 입는 도복과 사용하는 기술은 같지만 규칙은 완전히 다르다고 할 정도로 다른 유도이다.


국제유도협회 규칙은 두 말할 필요 없고 전통을 중시하는 강도관 규칙조차 유도가 무술이 아닌 스포츠로 변화해 가면서 만들어진 규칙이다. 그래서 현재의 유도는 선 상태에서 공격하는 메치기가 기본이 된다. 땅바닥에 누워서 뒹굴뒹굴하는 유도는 사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지루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이종격투기가 막 인기를 얻기 시작했을 때를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타격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아 그라운드 기술로 가기 위해 그저 발라당 누워버리는 경기는, 관중들의 흥미는 유발하지 못하겠지만 분노는 충분히 유발할 수 있다.


2001년 Price FC 다카다 노부히코 vs 크로캅 경기. 다카다가 엉덩이가 간지러운 강아지마냥 계속 바닥을 기어 다녀서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함



그래서 강도관 규칙이든 국제유도협회 규칙이든 만약 누운 기술(寝技/네와자/굳히기)로 들어갈 경우 조금이라도 흐름이 끊기면 바로 경기를 멈추고 다시 일어서서 시합이 진행된다. 하지만 고전유도에서는 누운 기술에 들어가더라도 경기가 중단되지 않는다. 심지어 상대를 잡자마자 공격을 하지 않고 누운 기술로 끌어들이는 引き込み(히키코미, 번역하자면 '끌어들이기')까지 허용이 된다. 이는 현대 유도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일로 만약 일반 대회에서 상대를 잡자마자 누운 기술을 하기 위해 엉덩이를 깔고 앉는다면 바로 반칙을 받을 것이다.



서로 잡자마자 누워서 어화둥둥하는 모습. 주로 한쪽만 잡자마자 누운 기술로 들어가나 저들은 시합 내내 둘 다 잡자마자 누워서 관계자들의 치를 떨게 했다.


이렇게 고전유도에서는 누운 기술로 들어가더라도 경기가 중단되지 않기 때문에 한 명이 상대를 완전히 뿌리치고 일어서야지만 '그쳐(そのまま)'가 선언이 되고 다시 서서 경기가 진행된다. 사실 이것도 큰 의미가 없는 것이 다시 잡자마자 앉아 버리면 그만이다. 그래서 체격이나 메치기 기술 차이가 크면 잡자마자 앉아 버리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한다.


만약 누워서 경기를 펼치던 중 장외로 나가게 된다면?


서로 맞잡은 상태 그대로 멈추고 심판들이 달려들어 그들을 끌고 가운데로 옮긴다. 처음 이것을 보면 매우 볼만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주심과 부심 3명이 달려들어 선수들을 경기장 가운데로 옮기는 사진




앞서 말했든 '고전'이라는 말은 '고등전문학교(지금의 대학교 정도)'의 줄임말이며 고전유도는 당시 대학교를 중심으로 행해지던 유도였다. 최초로 고전유도의 시합이 열린 것은 1914년 교토제국대학이 주최한 '제1회 전국 고전유도 대회'이다. 이 대회는 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1940년 27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1952년 교토대학에서 구 제국대학이었던 7개의 국립대학을 모아 '전국 칠대학 유도우승대회(全国七大学柔道優勝大會)'라는 이름의 대회를 만듦으로써 고전유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름도 긴 이 '전국 칠대학 유도우승대회'는 보통 줄여서 나나다이센(七大戦(*)) 또는 더 줄여서 나나센(七戦) 이라고 부르며 매년 6~7월경 7개의 국립대학(홋카이도, 토호쿠, 도쿄, 나고야, 교토, 오사카, 큐슈대학)이 돌아가면서 경기를 주최한다. 참고로 일곱 개의 학교 중 가장 많이 우승을 한 곳은 교토대학(26회)이며, 토호쿠대학(11회)이 그 뒤를 잇고 있다.

(*) 예전에는 제국대학이라고 불렸기 때문에 시치테이센 또는 나나테이센(七帝戦)이라고 불렀다. 요즘에도 그 말이 사용되기는 하나 개인적으로는 나나센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이 경기에 사용되는 규칙은 기본적으로 누운 기술 위주의 고전유도 규칙을 계승하며 매년 경기 전/후로 회의를 개최하여 조금씩 규칙을 개정해 나가고 있다. 일반 유도 대회에서는 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이한 점들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1. 앞서 말했듯 누운 기술에 들어가더라도 경기가 멈추지 않는다. 누운 기술의 경우 일반 유도와 같이, 그리고 주짓주와는 달리 하반신을 꺾거나 비트는 공격은 인정되지 않는다.


2. 승리하기 위해서는 오직 한판을 획득해야만 한다. 득점 중 유효와 효과는 존재하지 않으며 절반은 있지만 경기 중 절반을 획득하더라도 절반 두 개를 획득해서 한판(즉, 절반 합쳐서 한판)을 만들지 않고서야 그대로 무승부로 경기가 끝나고 만다(*). 이렇게 누운 기술 위주의 경기에 한판승밖에 없다는 사실은 우리와 같은 아마추어들에게는 희망이 될 수도 있다. 대학에 들어가 처음 운동을 했더라도, 체격이나 완력 차이가 크게 나더라도, 열심히 운동한다면 경기에서 무승부까지는 노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참고로 나무위키 '고전유도' 항목에 '한판이 선언되지 않으면 절반을 더 많이 보유한 선수가 승리한다'라고 되어있는데 1940년 이전 규칙은 찾을 수 없어서 모르겠으나 현재 고전유도를 계승한 대회(七大戰, '나나다이센')에서는 맞지 않는 말이다.
 참고 자료: 칠 대학 유도 대회 시합 규칙(2016년)


3. 개인전 없이 15:15 단체전만 진행되며 이길 경우 계속해서 다음 상대를 상대하고, 비길 경우 둘 다 시합에서 빠지게 된다. 따라서 시합에 나가는 순서(오더)를 짤 때 이길 수 있는 선수와 비길 수 있는 선수를 적절히 배치해야 단체전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아진다. 이때 여러 명을 이기는 경우 '제거(抜き, 느키)'한다고 말하며 한 시합에서 연속으로 많이 이길수록 그 숫자가 훈장처럼 따라다니기도 한다(나와 나이가 같지만 선배였던 사람은 2년 전 시합(2005년)에서 7번을 연속으로 승리하여 큐슈대학의 전설이 되었다).


시합 결과의 한 예(나고야대 vs 교토대). X는 비긴 것이고 가운데 한자가 적힌 것은 그 기술로 이겼다는 뜻이다. 보통 저렇게 한 명 이기기가 힘들다.


4. 한 경기 당 시합 시간은 6분이며 마지막 '부장(14번째 선수)'과 '대장(15번째 선수)'이 뛰는 시합은 8분이다. 시합 시간도 긴 데다가 15명이나 출전하기 때문에 단체전 한 경기가 끝나는데 1시간 30분 정도 걸리며 2시간이 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당시(2007년) 다른 학교 시합을 보는데 지루하고 졸려서 조금 자고 난 후 다른 부원과 30분 연습을 했다가 돌아왔는데도 경기가 끝나지 않았을 정도였다.



한편 일본 내에서도 고전유도 형식으로 시합이 이루어지는 대회는 이 대회가 유일하다. 그래서 비록 대부분 아마추어 선수들이 참가하는 시합이지만(간혹 준프로급 선수(*)들이 있기는 하다) 가치가 높은 대회라고 한다. 유도부 OB들은 이 대회를 '전 일본 학생 선수권대회(**)'와 함께 일본 대학 유도계를 지탱하는 양대 산맥이라고 이야기할 정도이다. 물론 일반 대학에서 운동을 하는 선수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 일본은 워낙 아마추어 유도가 발달했기 때문에 일반 학교에도 종종 실업 선수 레벨의 선수들이 있다.
(**) 안창림 선수가 2013년 우승한 그 대회. 앞서 말한 나와 동갑이었던 전설적인 선배가 2005년 이 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다.


이 나나다이센(七大戦)에 참가하는 7개 국립대학 유도부 학생들은 오직 이 경기만을 위해서 운동을 한다고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이 녀석들은 '이 경기만을 위해서 학교에 다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선배들의 관심과 지원도 엄청나서 평소에도 지원은 많지만 특히 이 경기를 위해서는 엄청나게 지원을 한다. 15~20명에 달하는 학생들의 숙식비, 교통비는 물론이고 도복까지도 새로 맞춰 준다(큐슈대학은 그랬으니 다른 학교도 그보다 못하진 않을 것).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2019년 68회 후쿠오카에서 벌어진 대회를 마지막으로 대회가 열리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 경기만을 위해서 학교에 다니는 재학생들과, 이 경기에서 우승하는 것을 보기 위해 후원하는 선배들의 상심이 크겠다.






처음 교환학생을 지원할 때만 하더라도  세상에 고전유도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큐슈대학 교환학생에 합격하고 나서 일본에서도 유도를 하기 위해 인터넷에 큐슈대학 유도부를 찾아보았다. 마침 1 (2005) 나나다이센(七大)에서 우승을 하고 나서  인터뷰를 찾을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누운 기술 위주로 경기를 하는 고전유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뭔가 신기하면서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니 잘 와닿지는 않았다. 그런데 마침 우리 유도부에서도 누운 기술은 다른 곳보다 많이 하는 편이었으니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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