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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검사 Jan 15. 2023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인생의 첫 파업 이야기, 그것도 캐나다에서 9

노조에서 온타리오 노동 위원회(Ontario Labour Relation Board)에 회사가 악의적으로 단체협상에 임하고 있다고 불만을 제출하고 중재를 요청하자 사측에서도 바로 같은 이유로 노동 위원회에 불만을 제출하였다. 회사의 그런 반응은 새삼 놀랍지도 않았지만 왜 저렇게까지 하고 싶을까 궁금하기는 했다.


양측의 불만과 노조의 중재 요청을 접수한 노동 위원회는 정해진 절차에 따라 양측의 입장을 듣는 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뭐든 쉽게 진행되는 것은 없어서 (2022년) 9월 말로 정해졌던 일정이 두 차례 연기된 끝에 10월 초로 확정되었다. 미팅이 시작된다고는 해도 결론까지 나려면 또 몇 주는 걸릴 것이기 때문에 크게 기대는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참 오랜만에 뭔가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그 미팅을 앞두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두 달 넘도록 전혀 협상에 임하지 않았던 회사가 갑자기 협상 테이블로 돌아온 것이다. 노조에서 제출한 불만과 중재 요청 중 무엇이 그들을 더 압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9월 30일부터 양측이 다시 협상을 하기 시작해서 일주일 동안 네 차례나 협상이 진행되었다. 뭔가 매우 긴박하게 협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도 나는 협상이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이 회사가 보여준 행태를 본다면 협상이 마무리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다만 이 협상이 잘 되지 않더라도 중재로 갈 수 있는 길이 남아있으니 몇 주 안에는 어떻게 마무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10월 7일, 노조에서 이메일이 와서 회사와의 협상이 완료되었고 다음 날 바로 협상된 단체협약에 대한 찬반 투표를 진행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아직 회사로 돌아갈 마음에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나로서는 정말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 찬반투표는 남아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협상이 끝나버릴 줄이야!



다음 날 벌어진 노조 회의는 중요도에 비해 엄청나게 지루했다. 단체협약의 내용이 중요하긴 하겠지만 모든 항목을 하나하나 설명했기 때문에 그것을 설명하는데만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각 항목마다 결론만 이야기하면 참 좋았을 텐데 각 항목마다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를 이야기하느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그 비하인드 스토리는 지난 두 달 동안 지겹도록 들었는데 말이다. 


기나긴 설명 끝에 노조원들에게서 질문을 받는 시간이 이어졌다. 초반 분위기는 '겨우 이것을 얻자고 두 달이 넘게 파업을 했는가'였다. 사실 금전적인 측면에서는 내가 봐도 우리가 얻은 것이 별로 없었다. 현재 물가 상승률만 해도 10% 가까이 되는데 임금 인상률은 겨우 2.5%에 불과했다. 


한편 누군가 단체협상 결과에 대해 반대표가 더 많이 나오면 어떻게 되느냐라고 물었고 노조에서는 다시 협상을 진행해야 하겠지만 이것보다 더 나아질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만약 중재에 들어간다고 해도 이미 협상된 내용 이상으로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는 투표를 하기 전부터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은 없었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분위기는 '아쉽든 어쨌든 지금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전혀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파업을 진행하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질문이 끝난 후 투표를 앞두고 협상을 진행했던 노조 대표들이 한 마디씩 했다. 모두들 최선을 다했지만 아쉬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그나마 내가 속해있는 그룹(보일러/압력용기) 대표의 말이 훌륭했다.


미안하다. 당신들은 응당 이것보다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받았어야 했다. 그런데 배신자(Scab)들 때문에 우리가 협상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너무 줄어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단체협약에 대한 찬반투표가 진행되었다. 


단체협상에 대한 찬반을 묻는 투표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120명 정도가 투표에 참석했고 10명 정도만이 반대를 하여 정식적으로 파업은 마무리가 되었다. 그렇다고 당장 일터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고 준비 기간을 거쳐 열흘 후인 10월 18일부터 업무에 복귀하게 되었다. 앞으로 열흘 동안 파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을 하지도 않는 (물론 돈도 받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파업이 (2022년) 7월 21일에 시작되었으나 거의 3달 만에 업무로 복귀하게 되는 것이었다. 협상 내용이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파업이 끝났으니 다들 속은 시원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기쁘지도 않고 속도 시원하지 않았다. 






무기명 투표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누가 회사로 돌아가는 것에 반대를 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한 사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나이다. 


내가 반대표를 던진 이유는 단체협약의 내용보다 그동안 회사에 너무 실망을 했기 때문이다. 두 달이 넘는 파업 기간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회사가 보여준 행태는 정말 자기 직원들을 똥으로 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성의가 없는 협상 의지, 시간 지연, 비상식적인 행태(예를 들어 비밀번호로 잠긴 PDF를 보내고 비밀번호는 주지 않음) 등등 지금까지 내가 겨우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회사를 위해서 일을 했나 고민이 되었다.


내가 이렇게 실망을 한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이전에 노조에 속해 본 경험이 있어서이다. 이전 회사에서 해고 통지를 받은 이후 내 권리를 알기 위해서 처음으로 단체협약이란 것을 읽어 보았는데 그때 단체협약이 참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체협약 속에 해고에 관한 보상 및 절차, 휴가에 대한 규정, 급여에 대한 규정 등이 모두 담겨 있기 때문에 단체협약이 우리같이 전혀 힘이 없는 월급쟁이들에게는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회사에 노조가 설립된다고 했을 때 은근히 기대가 컸다. 경제적인 내용이야 잘되면 좋겠지만 처음부터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다만 예전 회사의 단체협약처럼 우리도 단체협약을 가지게 된다면 적어도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던 많은 것들이 명문화되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기대가 너무 높았나 보다. 예전 단체협약에서는 정말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던 내용들조차 이 회사에서는 거부를 했다. 예를 들어 해고 통지를 5일 전에 하겠다(예전 회사는 60일), 징계 시 노조 대표가 함께 참석하는 것에 반대, 건강검진을 통해 업무에 적합한지 여부 확인, 기존에 제공하던 베네핏도 단체협약에 넣지 않겠다 등등 도대체 이럴 것이면 뭐 하러 단체협약을 하는가 싶었다.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 자체가 회사의 노림수가 아니었을까.


아무튼 이렇기 때문에 어느 순간 나의 목표는 무조건 파업이 끝나기 전에 회사를 떠나서 다시는 이 회사에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파업에 참여한 노조원들을 엿 먹인 회사에게 내가 엿 먹일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나의 새로운 애마 에어컨 없는 2013 액센트 수동을 장만했을 때만 해도 이 녀석을 타고 곧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원해 볼만한 채용 공고도 여기저기 보였고, 심지어 지원을 한 곳 절반 이상에서 면접을 보자고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 매주 한두 번 정도 계속 면접을 봤다. 


하지만 내가 너무 이직을 쉽게 생각했나 보다. 오랜만에 이직을 하는 것이다 보니 감을 잃었는지 마지막 면접까지 통과해서 오퍼를 주는 곳은 없었다. 그나마 한 군데에서 최종 오퍼를 받기는 했지만 출퇴근하기에 너무 멀고(집에서 140km 거리) 지금까지 하는 일과는 조금 달라서 몇 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거절을 했다. 그 결과 단체협약 찬반 투표를 했을 당시 앞으로도 한 두 개의 면접이 더 남아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회사에 복귀하는 날까지 다른 회사로부터 오퍼를 받을 가망성은 없었다. 


정말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남아있는 대안이 없었으니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니 참 힘들었다. 지난 3개월 동안 쌓여있을 일과 배신자(Scab)들과 일을 해야 된다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우울했다. 그저 창밖을 보면서 어떻게 하루라도 빨리 이 회사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생각하며 한숨만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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