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달 25일, 월급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거북이알은 유비카드 포인트를 조회할 수 있는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회장의 한마디에 정말로 월급이 고스란히 포인트로 적립되어 있었다. 그 커다란 숫자를 보는 순간, 거북이알은 심장께의 무언가가 발밑의 어딘가로 곤두박질쳐지는 것만 같은 모멸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회사에서 울어본 적 있어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회사 생활 십오년 하면서 한번도 운 적이 없었거든요. 루바 공연 건 때문에 특진 취소되고, 팀 옮겨지고, 강남에서 판교로 짐 싸서 올 때도 눈물이 안 났어요. 그런데 그 포인트를 보고 있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포인트가 너무 많아서. 너무 막막해서."
굴욕감에 침잠된 채로 밤을 지새웠고, 이미 나라는 사람은 없어져버린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되었다고. 그런데도 어김없이 날은 밝았고 여전히 자신이 세계 속에 존재하며 출근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했다. 억지로 출근해서 하루를 보낸 그날 저녁, 이상하게도 거북이알은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포인트로 모닝커피 마시고, 포인트 되는 식당에서 점심 먹고, 포인트로 장 보고, 부모님 생신선물도 포인트로 결제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더 보내고 나서 그녀는 모든 것을 한결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 장류진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 中 -
이 책을 읽고 현실에 있을 법한 얘기 같아 재밌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돌이켜보니 내가 일하고 있는 현실에서 오히려 소설 속 얘기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회장 뿐인가. 오너 일가와 대표이사의 말 한마디에, 무소불위의 "OO님 지시 건입니다." 메일이 하달되면서부터 순식간에 모든 일이 착착착 진행되는 곳이 나의 직장이다.
욕심 많고, 사람 귀한 줄 모르는 오너 밑에서 임직원은 더 이상 조직원의 마인드를 갖지 않게 된다. 똑똑하지 못한 오너일수록 역량과 인성을 갖춘 이보다 내 말을 잘 듣는 사람을 곁에 두려 한다. 말을 잘 듣는 사람이란, 자기 의견을 내지 않아 심기를 상하게 하지 않고, 시키는 일을 잡음 없이 해 오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 말인즉슨 아래로 내려올수록 '꿀 먹은 벙어리'로 입 닫고 살아야 한다는 거다. 무소불위에 의해 시작된 일에 "Why?"를 외쳐봐야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으며, 그걸 알려고 하는 순간 "까다로운, 귀찮은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위에서 시킨 일이 아니면 타 부서/동료가 요청해도 응하지 않으려는 근무 태도가 만연해있고, 서로를 'co-worker/동료'로 의지하며 일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개인주의를 넘어서 이기주의 성향이 짙달까. 남에 대한 소문만 무성할 뿐, 정작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은 없는 조직문화 속에 있노라면 참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2년 6개월을 다닌 이 시점에도 나는 아직 이방인인 것 같은, 일만 하고 돌아갈 파견직인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물론, 인복 있게 좋은 동료들을 만나, 이들에게 받는 위안과 공감으로 헛헛해진 마음을 가득 채우며 다니고 있다.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1년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외롭게 만드는 것도, 그 외로움을 흩어지게 해주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다)
구체적으로 "내 말을 잘 듣는 사람만 곁에 두려는 경영자"에 의해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조직문화"에서 직원들이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하게 되는지 몇 가지 리스트업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 위에서 관심 없는 내용은 보고하지 않는다 (리스크 요인일지라도)
- 회사/제품에 부정적인 소비자 및 내부고객 의견과 조사 결과 등을 적시에 보고하지 않는다
- 경쟁사나 타 업계의 이슈를 주의 깊게 보지 않는다. 중요한 건 내 거(우리 회사)다.
- 다른 팀, 다른 부서에서 필요한 정보라도 공유하지 않는다
- 다른 팀에 전달한 문서가 유출된다면, 그건 유출자가 아닌 너의 탓이다
- 같은 팀 내 팀원에게도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
- A팀이 하는 일을 B팀이 알아서는 안 된다
- 위에서 잘했다고 하지 않는 한, 너는 잘한 게 아니다
- 위에서 잘했다고 해도, 너는 잘한 게 아니다
- 성과를 200%, 500% 올렸다 해도, 그건 당연히 너의 일을 했을 뿐 잘한 게 아니다
- 대부분의 직원들은 본인 의견을 상사에게 말하지 않는다
- 네가 OOO에 스페셜리스트 건 뭐건 상관없다. 회사가 시키면 ㅁㅁㅁ를 해야 한다
- IMC를 외쳐대지만 마케팅 사업부를 각기 다른 상무 밑으로 쪼개고 쪼개 놓는다
- 95% 이상이 top-down이다. 제품 PM은 오퍼레이터에 불과하며 기획의 개념이 없다
(마케팅 PM이 컨셉보드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 본인이 하고 있는 일의 배경/목적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 본인이 하고 있는 일이 미칠 영향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 계획 없는 사업계획을 한다. 제대로 된 방향성 없이 각 사업부에서 하루 만에 작성해서 취합한다
(이걸 발표하는 분이 가장 대단하다)
- 외부에서 온 임원은 여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고, 금방 갈 사람이라 생각한다
(오자마자 임원부터 사원까지 모두가 무시한다)
- 경력 직원은 오래 안 다닐 떠돌이라는 말을 대놓고 한다
- 아닌 땐 굴뚝에 연기 같은 헛소문이 어느 순간 기정 사실화되며, 말을 옮기는 이들에게 양심의 가책이란 찾아볼 수 없다
'일', '직장'이란 무엇일까. 직장에 큰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된다고, 자아실현은 회사 밖에서 하는 거라고 많이들 얘기한다. 나 역시 생계형으로 직장을 다녀야 하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땐 월급만을 바라보며 다른 생각을 안 하려 한다. '그래, 회사에서 행복할 필요는 없으니까.'를 되뇌며.
허나, 천근만근 같은 몸을 일으켜 출근 준비하고, 만원 지하철을 타고/걷고/뛰고, 지하철보다 더 숨 막히는 지옥 엘베를 타고, 에너지를 채우려 커피를 들이켜고, 꼼짝하지 않고 몇 시간을 앉아 일해 거북목이 되고 다리가 퉁퉁 부어 퇴근해 집에 오기까지.
눈을 뜨고 있는 15~16시간 동안, 출퇴근 포함 회사에 바치는 시간은 최소 12시간 즉, ¾이 넘는다. 그 시간을 정말 월급을 위해서,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 걸까?
물론 생계를 위해 일하는 것은 숭고한 일이다. 웹툰 '마음의 소리' 작가 조석이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나와 얘기했을 때 울컥할 정도로 위로가 됐다. '그래, 회사를 다니는 것만으로도 숭고한 일을 하고 있다. 그걸로 됐다.' 하면서.
하지만, 조직의 한 구성원으로서 목표 달성에 일조했을 때, 내가 하는 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라 느꼈을 때, 내가 한 일이 결론적으로 아무 성과에 반영되지 않았어도 상사/동료에게 '수고했다, 잘했다, 좋았다' 한마디를 들었을 때.
그때 느끼는 성취감은 조직원으로서의 애사심뿐만 아니라, 회사 밖 나아가 내 인생에서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자기 효능감을 심어주며, 내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곳에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
즉, "제대로"하는 회사생활은 내 인생의 "선순환"으로 이어진다는 말이다.
이곳을 오래 다니지 않아야겠다 결심했던 건, 훌륭한 역량과 인성을 갖춘 동료들이 본인 스스로에 대해 부족하다 말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겪으며 객관적으로 본 결과, 내가 경험한 데이터 기준으로 충분히 훌륭한 동료들이었다. 타인을 낮추고 보는 이곳 특유의 조직 문화가 그들의 자기 효능감을 낮게 만드는 것이 명확했고, 아무리 옆에서 '아니다, 충분히 훌륭하다' 얘기를 해도 지친 마음속엔 위로받을 공간이 남지 않은 듯해 안타까웠다. 회사를 다님에 있어 눈에 보이는 성과는 물론 기분 좋지만, 평소 내가 겪은 고됨과 노력을 알아주는 상사와 동료의 '잘했어, 수고했어, 덕분에 잘 해결됐어, 좋았어' 한마디가 가장 보람되지 않을까. 반면, 칭찬에 인색한, 남을 깎아내리는 게 일상인 문화는 내 일에 대한 의욕도 같이 깎아내리며 악순환을 만들 뿐이다. 누구 한 사람에 의해 바뀔 수 있는 문화가 아니기에.. 나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훌륭한 나의 동료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