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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 off 심리치유책방 Apr 13. 2024

사랑에 빠지지 않고 사랑하는 법 -사랑의 외로움

'사랑예찬'-알랭바디우 인용

“ 아 진짜. 너무 힘들어. 연애하는 거 너무 피곤해 ”

사랑은 지가 하는데 나는 도대체 왜 내 돈을 써가며 들어주고 있는 걸까.

( 아이고. 내가 이 나이에 네 말을 듣는 게 더 피곤하다. 피곤해 )

속으로 욕하면서도 한껏 다정하게 웃으며 커피 값을 결제 중이다.

“ 그래? 그 시끼 이모가 어떻게 해줘? 이 놈 안 되겄어. 엉? ”

“ 진짜? 그럴래? 아니다.. 이거 어떻게 생각해? 평소에 잘해줘. 연락도 바로 하고 암튼 다정하긴 해.. 그런데 얼마 전에 피곤하다고 그래서 일찍 가서 쉬라고 했거든, 그런데 친구들이랑 술을 마셨더라니까. 여자 생긴 걸까? 이모 응?”

“ 설마? 물어봐. 그냥. 괜히 맘 상하지 말고 ”

“ 자존심 상해서 싫어. 괜히 집착하는 거 같잖아. 난 좀 쿨한 이미지거든. 이모 어떡하지?”

이런...



연애 전 누구나 이런 소망이 있다. 상대가 나를 더 사랑해서 상처받지 않고 절대적으로 받기만 하는 헌신적 사랑을 하리라. 나는 사랑에 빠지지 않고 사랑을 하는 손해 1도 안 보는 이기심 그득한 사랑, 환상적이지 않은가. 물론 환상적 소망은 금세 절망이 되었다.     


도대체 사랑은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알랭 바디우는 사랑이란 둘만의 진리, 둘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사랑예찬, 16쪽). 조금씩 정성스럽게 쌓아온 삶의 방식을 홀랑 버리고 상대에게 맞추고 싶은 황당하고도 당황스러운 맘을 가지며 급기야는 너만 사랑한다는 맹세를 하며 다른 세계로 뛰어드는 모험이다. 여행보다 모험인 사랑은 더 짜릿하고도 위태롭고 불안하며 동시에 신선하며 설레나 보다. 어릴 쩍 사랑을 드라마로 배워 사랑은 설렘이고 그 첫 만남의 설렘은 계속되어 결혼으로 완성되는 줄 알았다. 현실의 사랑은 완전 딴판이다. 첫 만남의 설렘은 잠시이고 둘만의 세계를 구축하기도 전에 고통스럽고 튼튼한 집을 짓는 것이 힘이 들 듯 견고한 사랑은 갖출 것이 너무나도 많아 보인다. 그러나 알랭 바디우의 말처럼 사랑은 둘이 만든 집을 보수하고 다듬으며 ‘지속성’을 유지하는 것이 진리다. 보시라. 사랑을 시작한 모든 사람들은 우리 조카처럼 쿨한척하며 때론 애걸 복걸하며 어렵게 구축한 사랑의 감정이 오래가기를 바라고 있다.

사랑을 하게 되면 그동안 봐왔던 풍경이 달라 보이는 마법을 경험하기도 하고 모르는 아주머니를 어머니라 부르는 등 불가능을 가능으로 연결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사랑을 안 해본 사람은 있어도 사랑을 시작하면 한 번으로 끝내는 사람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세상을 다르게 보고 나를 성장시키는 이 엄청난 경험을 그만둘 길이 없다. 첫 설렘이 오래가길 바라지만 현실의 사랑은 그렇게 신통치 않아 보인다. 설렘을 유지하며 만나기에는 이제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 둘 만의 견고한 세계를 구축하고 유지하기에는 설렘은 금방 휘발하고 가벼운 연애 상대는 많아 보인다.

거기다 최근에는 많은 연애 리얼리티에서 조건과 취향을 맞추면 사랑을 지속하면서도 덜 고통스럽다는 “사랑에 빠지지 않고 사랑하는 법”을 전시한다. 연애 프로그램에선 이별과 수용과 용서하는 과정의 고통이 생략되고 손 빠른 계산을 하고 뒤돌아서 바로 다른 만남을 가진다.  짧게 만나 취향을 맞으면 짬을 내고 사랑하고 아니다 싶으면 최대한 빨리 도망가는 방식에 익숙해진다.


‘사랑예찬’에서 인간을 성숙하게 만드는 결정적 경험인 사랑은 고통으로 완성된다고 본다. 결과로 증명되지 않고 과정으로 유지되는 사랑은 집을 유지 보수하듯 ‘노력’이 필요하다. 사랑의 지속성은 설렘이 아닌 노력이라 힘든가 보다.     


‘사랑’이라는 과정을 지속하고 유지하는 노력을 해보고 싶은 사람은 다음을 명심해야 한다.

( 조카 지연이는 명심하거라. ㅎㅎ)

첫째. 서로에게 집중하고 안전을 추구하면 안 된다. 서로의 사이에 무언가가 끼어들기 시작하면 둘이 구축한 세상은 무너지는 것이다.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같은 코스의 데이트를 즐기고 서로가 서로를 보지 않고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다면 더 이상 새로움은 없고 이미 사랑의 세계는 무너진 것이다. 둘이 만든 세계를 둘 만의 진리로 인식하고 서로에 대한 관심을 지속할 때 사랑은 무너지지 않는다.


둘째. 내 결핍을 해소하고자 사랑을 선택하면 안 된다. 지나간 사랑을 잊기 위해 혹은 가족에게 받은 상처를 달래고자 대신할 사람을 찾아 사랑하면 그것은 그냥 편리이고 진정으로 새로운 만남이 될 수 없다. 수단화된 만남은 상대에게 오로지 집중할 수 없고 애정결핍이 발생하고 끝없이 사랑을 확인받고 싶고 사랑은 전쟁으로 변한다.


결국 사랑에 빠졌다는 건 고통이고 위험한 행동이다. 사랑에 빠지지 않고 사랑하는 법은 없다. 다른 일들은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일에서 시작되지만 사랑은 고통을 감수하는 모험에서 시작된다.

꼬마였던 지금은 누구보다 어른인 지연이는 용기를 내어 사랑을 하는 중인가 보다. 머리를 뜯으며 정말 답답해하고 있다.

그러다 문득 요즘 사랑이 안쓰럽기도 하다. 요즘처럼 사는 게 복잡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취업도 생각해야 하고 학점도 신경 써야 하는 입장에선 그 좋은 사랑도 피곤한 것이 되어 버리는 걸까? 이 글 끝에 이런 생각을 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 피곤한 사랑 대신 잠깐 만나고 헤어지는 연애를 선택하게 된 것이 단지 연애 리얼 프로그램 때문인 걸까? 사랑의 고통을 감당하라고 진지한 만남을 하는 것이 가장 인간으로 옳은 것이라고 말하는 건 괜찮은 걸까?

알랭 바디우에게 묻고 싶다. ‘정말 사랑의 본질은 둘 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지속하는 윤리적인 건가요? 그건 사랑이 평온하게 지속되던 낭만의 시대에나 가능한 이야기가 아닌가요?’


사랑예찬을 읽었으나 사랑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 사랑예찬- 알랭 바디우 44쪽 인용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지속되는 하나의 구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끈덕지게 이어지는 일종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모험적인 측면은 사랑에 필요한 것이겠지만 한편,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끈덕짐을 덜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하여 사랑을 포기해 버리는 것은 사랑에 대한 커다란 왜곡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 나가는 그런 사랑일 것입니다.     

사랑에서 제 관심을 끄는 지속성에 관한 문제도 바로 여기에 놓여있습니다. 좀 더 명확히 말해보겠습니다. 이 "지속성'"이라는 표현에서 사랑이 지속되고 서로가 항상 사랑하며 또는 영원히 사랑한다는 의미에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삶에서 지속되고 있는 여러 가

지 다른 방식을 사랑이 창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지요. 각자라는 존재는 사랑의 시련 속에서 새로운 시간성과 직면하게 됩니다. 물론. 시인의 어투로 말하자면 사랑은 "지속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서, 사랑은 미지의 무엇을 지

속 시키려는 욕망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랑은 삶의 재발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재발명하는 것. 그것은 바로 이러한 재발명을 재발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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