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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사랑한다면

제주 일상 그림일기 15

by Lara 유현정



내 주변엔 제주살이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미 제주를 탐했던 나이기에 는 그들의 로망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하여 난 연말 전세와 연세에 이어 한 달 살기까지 세 명의 구들에게 제주도 숙소를 이어주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렇다고 내가 뭐 부동산 업자는 아니다. 어느새 제주살이 10년 차에 접어들다 보니, 현지 사정에 밝아져서 좋은 조건의 숙소가 나오면 아까워 지인들에게 소개를 하는 것뿐이다.


나는 틈틈이 제주 오일장 신문과 교차로 신문을 구독한다. 이들은 제주의 부동산을 전문으로 개하는 신문으로서, 내가 서귀포에서 집을 구할 때도 오일장 신문의 덕을 톡톡이 봤다. 최근에는 당근 마켓에도 부동산 매물을 올린다지만, 아직은 신문이 대세이다. 제주도에서는 지역마다 부동산 중개소를 쫓아다닐 수는 없기에 다들 신문들을 활용한다. 동네 곳곳에 무료로 배포되어서 나는 심심할 때 한 번씩 들고 와 들여다본다.


내 지인들 중에 제주살이 가장 열망하는 이는 아마도 C일 것이다. 그녀는 거의 계절마다 제주를 찾는다. 사실 내가 오일장 신문을 뒤지는 것은 모두 그녀 때문이다. 어찌나 제주를 사랑하는지 가끔은 나를 능가할 정도이다. 그러니 주기적으로 적당한 매물이 나왔는지 유심히 찾아보게 된다. 그렇게 내가 먼저 몸이 달아 소개하기를 십수 번, 그러나 그녀에겐 도대체 인연이 닿질 않았다. 그런 그녀가 지난 연말 또 한번의 제주여행을 단행하였다.




<그림 1> 오설록의 브런치


첫날 우리는 오설록으로 향했다.

초록의 녹차밭을 배경으로 널찍하게 자리한 카페 제주 하우스에서 브런치를 먹을 생각이었다. 유달리 햇살이 좋아 야외 테이블에 자리한 우리는 음식을 앞에 두고 의식처럼 기념샷을 남겼다. 바구니에 담겨 나온 해녀 도시락과 아보카도 샐러드가 눈부터 호강을 시켜주었다. 제주의 햇살이 길러낸 오색의 신선한 야채가 듬뿍 올려진 샐러드는 내 차지였다. 등 뒤로 내리쬐는 햇살은 또 어찌나 따사롭던지 시각에 이어 미각과 촉각까지 살아나며 세로토닌 수치가 한껏 고조되었다.


행복한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저지리 곶자왈을 걸었다. 올레길 14-1 코스에 해당하는 이 숲길은 오설록 녹차밭과도 연결된다. 3월이면 천리향이 무리 지어 피어나 온통 꽃 향기로 뒤덮이는 숲이다. 아직은 꽃이 땅속에 숨어 있는 겨울의 숲일지라도 파란 하늘 아래 푸른 이끼와 푸른 잎이 가득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카페 제주하우스의 브런치


<그림 2> 카멜리아 힐


다음 날 우리는 카멜리아 힐을 방문했다.

겨울이면 제주엔 동백이 어디서나 흐드러지게 피어나므로, 나는 굳이 비싼 관람료를 지불하며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을 선호하지 않는다. 러나 어쩔 수 없었다. 카멜리아 힐은 오로지 제주를 짧고 굵게 즐겨야 하는 C를 위한 선택이다.


너를 사랑하는 일
동백을 피우는 일


알고 보니 카멜리아 힐은 남편이 아내를 위해 심기 시작한 동백 꽃밭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꽃을 가꾸고 피우는 인생이라니, 낭만의 끝판왕 아닌가. 과연 한라산이 굽어보는 중산간의 안덕 마을에 온갖 빛깔과 모양의 동백을 모아 놓은 살아 숨 쉬는 박물관이었다. 부지는 또 어찌나 광활하던지 다양한 코스를 세 시간 가까이 돌면서 나는 결국 에너지가 바닥나고 말았다. 마지막 코스 억새와 팜파스그라스가 어우러진 정원을 돌고 나 지친 다리가 천근만근이었다.


출구로 향하데 너른 잔디 광장 중앙에 멀구슬나무 한 그루가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잠시 길이 어긋난 C를 기다릴 겸 잔디를 가로질러 나무 곁으로 다가섰다. 관람객을 위한 것인지 의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의자에 지친 몸을 기대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백 년을 살아온 듯한 거대한 나무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잎을 모두 떨구어낸 가지다 멀구슬만 대롱대롱 매달 있었다. 잠시 피곤한 두 눈을 감, 오늘 하루 내게 가장 큰 기쁨을 안긴 연한 핑크빛 동백의 화사한 미소어른거렸다.


멀구슬 나무와 연분홍 동백



<그림 3> 법환포구 일몰


C가 서울로 떠나는 날, 우리는 각자의 일정을 소화하고 법환 포구에서 다시 만났다. 늦은 서울행 비행기 시간에 맞춰 이른 저녁을 먹고 바닷가 카페로 갔다. 법환에서 가장 위치가 좋은 카페는 그새 새로 이층 건물을 지어 가게를 확장했다. 우리는 차를 들고 이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뉘엿뉘엿 하루 해가 저무는 시간이었다. 그녀의 여행도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해가 시야를 벗어나 짙은 구름 속으로 사라지자, 그녀는 나직이 아쉬움을 토해냈다.


짧은 여행이었다. 며칠간 그녀는 활짝 핀 꽃처럼 웃며 행복해했다. 에너지를 충전했으니 당분간 서울살이를 버틸 수 있을 테지. 하지만 나는 녀가 직도 제주를 사랑한다면, 이제는 황을 뛰어넘어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해에는 자신의 행복 앞에서 좀 더 용감해지길 바라며, 나는 집으로 돌아와 그녀와의 추억을 그림으로 그려 보냈다. 또다시 제주가 그리워지거나 마음이 오그라들 거칠어지는 날, 한 번씩 꺼내보라고.


카페에서 바라본 일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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