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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천국 왕이메

제주일상 그림일기 2

by Lara 유현정


제주 동부에 체 오름이 있다면
서부엔 왕이메가 있다.


내가 굳이 두 오름을 비교하는 이유가 있다. 사유지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오름 능선을 돌고 굼부리 안으로 들어섰을 때 만나게 되는 반전의 매력까지도 똑 닮았기 때문이다. 엇비슷한 시기에 알게 된 두 오름은 처음 본 순간 내게 비슷한 느낌의 깊은 감동을 안겨 주었다. 위치 정반대지만 생김새서로 많이 닮았고, 능선에서 분화구(굼부리)로 내려가는 길이 있어 굼부리 안을 관찰할 수 있는 귀한 오름들이다.


나는 언젠가 체 오름을 다녀와서 그 감흥을 브런치에 글로 쓴 적이 있다.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다랑쉬와 따라비를 제치고, 체오름이 나의 오름 인생에 최고의 오름으로 등극한 날이었다. 체오름의 반전 매력은 후박나무다. 오름 산행의 막다른 숲길에서 운명처럼 맞닥뜨린 장대한 나무는 깎아지른 절벽 아래 홀로 영원의 시간을 버텨온 듯했고, 뿜어내는 생명력이 대하였다. 오랜 세월 근육을 갈고닦은 불끈한 줄기는 가지마다 가득 자손을 달고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사유지인 체오름은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오름이다. 방문객의 쓰레기 투척으로 외부인 출입이 금지되면서 후박나무를 다시 보기 어렵다는 생각 가슴이 아올 정도였다. 그런데 그 자리를 대신하여 준 것이 바로 왕이메 오름이. 하나의 문이 닫히고 내게 다른 문이 열린 것이다. 왕이메는 후박나무를 대신하여 누구라도 첫눈에 반할 만큼 사랑스러운 야생화의 천국이었다. 이른 봄에 만난 세복수초와 변산바람꽃은 왕이메 오름의 절정이자 반전의 피날레요, 황홀한 해피엔딩이었다.




<그림 1> 변산바람꽃


마음이 급했다. 제주 친구의 블로그에 이미 왕이메 오름 소식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날씨 상태에 따라 개화시기가 달라지는 변산바람꽃 사진이 벌써 올라온 것이다. 나는 남편과 함께 서둘러 길을 나섰다. 왕이메의 지번은 안덕면 광평리 산 79번지다. 주차장이 따로 없기 때문에 표지판이 있는 오름 입구 갓길에 주차를 해야 한다.날은 2월 말 한파가 몰아닥치며 제주 산간에 눈을 뿌린 날이었다. 별 준비 없이 달려갔던 우리는 길이 미끄러워 도저히 산행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며칠 날씨가 차분해지길 기다린 후 다시 남편을 재촉했다. 음이 조급해서 우리는 로 굼부리로 행하였다. 잣담이 늘어선 삼나무 숲길을 지나 햇살이 가득 들어찬 굼부리로 들어섰다. 굼부리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제자리에 서서 360도를 돌며 오름 능선을 카메라에 파노라마로 담았다. 을 모두 떨구어낸 나목의 군락은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어 따스하고 포근해 보였다. 군데군데 상록의 삼나무 숲은 힘차게 하늘로 솟아올랐다.


나는 오름 동호회가 묶어 놓은 리본을 찾았다. 야생화는 쉽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방향을 바르게 잡고 관목 숲을 헤치며 가시덤불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들어서야 한다. 그러한 노력이 헛수고가 되지 않는 건, 바로 바닥을 가득 덮은 낙엽을 뚫고 올라오며 기지개를 켜는 변산바람꽃 때문이다. 그토록 작고 가녀린 몸으로 얼굴을 내밀고 여기저기서 손짓을 하면, 내 마음은 금새 콩닥콩닥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앙증맞고 가녀린 하얀 변산바람꽃은 굼부리 안 깊숙이 숨겨져 있는 왕이메의 보물이다.


이끼 꽃망울과 변산바람꽃


<그림 2> 세복수초


변산바람꽃을 실컷 구경하고 두어 주 쉬었다가, 다시 왕이메를 찾으면 이번에는 복수초를 질리도록 구경할 수 있다. 복수초는 굼부리로 직행하는 대신 오름 능선을 따라 한 바퀴 빙 돌면 더 많이 만게 된다. 능선은 오름 입구에서 곧바로 위로 직진하면 되는 길이다. 상 즈음에 넓은 초지가 나타나고 뒤는 한라산이, 앞으로는 서귀포 바다와 오름들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아스라이 펼쳐진다. 숲길은 오르락내리락 이어지는데 나무가 울창해서 굼부리에 닿을 동안 별다른 전망은 타나지 않는다. 대신에 능선 길 중간 느닷없이 수직동굴 2개가 연이어 나타난다. 난간이 설치된 동굴을 내려다 보면 가늠할 수 없는 깊이에 순간적으로 아찔해곤 한다.


능선 따라 걷는 내내 지난 번에는 보이지 않던 복수초가 어느새 얼어붙었던 땅을 뚫고 앞다투어 얼굴을 내밀며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능선 길이 끝나고 당도한 굼부리 안에도 온통 제 세상을 만나 노과 초록의 융단을 깔고 있었다. 육지에서 사진을 찍으러 온 작가가 세복수초는 제주에서만 자생하며 잎이 가늘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세복수초가 봄 햇살에 활짝 웃으니 정말 예쁘다고 답하며 함께 기뻐하였다. 이렇게 마다 3월이 되면 이 꽃들이 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릴 정도이다.


나는 이곳저곳으로 걸음을 옮겨다니며 가능한 세복수초 모두에게 하나씩 응대를 하였다. 그 수가 어찌나 많은지 나중에는 정신이 혼미해지며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잠시 굼부리 허허벌판으로 나와서 에너지를 충전하고 다시 관목 숲으로 들어갔다. 자세히 살펴보니 세복수초에 정신을 빼앗겨 미처 살피지 못한 뒤늦게 태어 변산바람꽃이 하늘하늘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맞아, 지난번엔 너희들이 주인공이었지! 지금은 세를 확장한 세복수초에 그 자리를 내주었구나. 육지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야생화를 해마다 질리도록 보여주는 왕이메 오름은 이제 체 오름을 대신하여 나의 오름으로 등극하고 말았다.


왕이메 오름과 세복수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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