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민화 관련 도서를 뒤지는데, 다른 책 하나가 눈에 띄었다. <철들고 그림 그리다>라는 제목이 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 같아 저절로 손이 갔다. 흘낏 책장을 넘겨 보다가 제법 내실이 있길래 자세히 읽고 싶어서 집으로 대출을 해 왔다.
"주위의 작은 것들을 관찰하고 자기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과정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상 예술가이다."
- 정진호 -
작가 정진호는 자신을 일상 예술가로 소개하였다. 책에는 나이 들어 그림을 그리면서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았다. 미술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그림에 로망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 용기 내어 따라 해 보면 좋을 법한 내용이었다. 이제 입시를 치를 것도 아니고 경쟁에서 벗어나 맘 편히 즐기며 자신의 일상을 화폭에 채워나가는 인생이라서, 여유롭고 풍요로우며 낭만적이기까지 하여 내심 부러웠다.
마침 최근에 시작한 민화 수업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화실에 나가는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나를 휘감고 있었다. 잠시 수업을 일주일에 두 번씩 나갈까 고민도 해봤지만, 나의 일상과 에너지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이런 마음도 초보자의 성급한 욕심이려니 여기며 달래고 있는 중이었다. 행복해지기 위해 주변의 일상을 그림으로 그린다는 저자의 메시지가 그런 내 마음을 비집고 들어왔다.
맞아! 민화만 그리란 법은 없지 않은가?
모든 진리가 그러하듯이, 그림도 결국은 하나로 통할 것이다. 기회가 되는대로 데생이든 크로키든 펜화든 수채화든 색연필화든 동양화든 뭐든 그리다 보면 언젠가는 서로 시너지를 내는 순간이 오지 않겠는가?아마도 유화는 빼고. 내가 좋아하는 서양화가들의 그림은 죄다 유화이건만, 이상하게도 나는 유독 유화는 그리고 싶지 않더라.
일상 예술가는 미술을 전공하고 오랜 시간 동안 그림을 그려온 사람과는 다른 방법으로 그림을 배워야 한다고, 작가는 말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려는 것이기 때문에, 기술이 아니라 시선을 먼저 바꿔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기술에 발목 잡히지 않고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는 소박한 그림 그리기라면, 일상의 온도를 따뜻하게 올려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릴 적 그림일기가 떠올랐다. 늘 숙제로 주어지던 일기였기에 미루고 미루다가 개학 전날 한꺼번에 그리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제 그런 구속 없이 스스로 자유롭게 일상을 그림으로 기록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행복할 것 같았다. 그림과 함께 좋아하는 시도 적고 소감도 간단히 곁들인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주변의 소중한 물건부터 시작해서 매일 일상의 행복한 순간을 스케치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림 실력도 훌쩍 늘어 있지 않을까. 어서 작은 스케치북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부풀며 발그스레 동심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매일 아침 만나는 커피잔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수채화 물통과 의자도 보였다. 그래, 바로 이거야! 단순하고 쉬운 것부터 시작하자.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며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한 걸음씩 따라가 보자.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올레길에서 화구를 펼치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근사한 날도 오겠지. 오늘이라는 시간을 무심히 흘려보내지 않고 행복한 순간을 붙잡아 스케치북에 차곡차곡 쌓아 놓을 것을 생각하니, 앞으로 만나는 하루가 예사롭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림 1> 커피잔
나는 매일 아침 커피 한잔과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 피부에 트러블이 생겨 밀가루와 함께 2년 가까이 끊었던 커피를 다시 시작하면서 일상의 기쁨이 한 뼘 추가되었다. 커피 만큼은 애정하는 잔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각별히 고르는 편이다. 이 컵은 체코 여행을 갔을 때 프라하 성의 황금소로에서 사 온 기념품이다. 바닥에 작가의 사인을 새겨 넣은 컵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넓어지는 독특한 모양에 내가 좋아하는 블루 칼라를 배경으로 가운데 볼록하게 붉은색 하트가 그려져 있다. 나는 컵을 본 순간 첫눈에 반했다. 첫 그림으로 나의 하루를 열어주는 고마운 커피잔을 그려 보았다.
<그림2> 수채화 물통
몇 년 전 수채화를 배우려고 여러 화구를 구입했다.그때는 스케줄이 너무 바쁠 때라 일주일에 한 번 나가는 수업인데도 많이 부담스러웠다. 각자 알아서 그리라는 화가 선생님의 지도 방식도 나와 잘 맞지 않았고, 수준이 천차만별인 수강생의 실력이 왕초보인 나를 주눅 들게 하였다. 나는 결국 전시회를 포기하게 되면서 그림까지 손을 놓고 말았다. 그 바람에 물통은 작은방 구석에 처박혀 존재감 없이 빛을 잃었다.
요즘은 민화를 그리며 이 물통을 사용한다. 파란색 물통은 칸이 세 개나 있어서 물을 구분해 쓸 수가 있고, 주황색 손잡이에는 홈이 패어 있어서 물감 묻은 붓을 뉘어 놓기에도 편리하다. 이제는 매일 아침 그림일기에 채색을 하며 물통을 마주한다. 하얀 스케치북에 연필 선으로 기초를 닦고 그 위에 살포시 색을 얹을 때, 나는 비로소 희열을 느끼며 행복을 향해 날아오른다.
<그림 3> 의자
제주 집엔 짙은 색상의 월넛 식탁에 맞춰 산 의자가 하나 있다. 밥을 먹을 때나 글 쓰고 그림을 그릴 때 언제나 내 차지가 되는 의자이다. 이 의자를 그리며 언젠가 읽었던 이정록 시인의 <의자>라는 제목의 시가 떠올랐다. 감동의 여운이 길게 남았던 시다. 노모의 통찰과 사랑을 넋두리처럼 풀어낸 시인의 감성이 따스하게 전해진다. 새삼 나에게도살면서 의자가 되어 준 가족과 친구와 제주의 자연이 고마웠다. 나도 세상에 편안한 의자가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