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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Jun 14. 2023

나는 꿈을 이룬 것 같아

<실화소설 3> 김비야는 날마다 카르페디엠


Y는 밤마다 가슴 통증에 시달렸다.

하루는 새벽에 된통 시달린 후, 종합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무래도 심장에 문제가 생긴 거 같아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종 검사에서 아무런 소견이 나오질 않자, 의사는 만일을 대비해 니트로글리세린이라는 비상약을 처방하였다. Y는 다시 통증이 찾아온 날 시험삼아 한 알을 혀 밑에 넣어 녹여보았다.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심장병이 아닌 것 확실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인지 좀 더 면밀히 관찰할 필요가 있었다.


통증은 한밤중에만 찾아왔는데,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면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Y는 이런 일이 반복되었기에, 새해 첫날 아주 작은 계획을 하나 세웠다. '아침에 제일 먼저 미소 짓기'를 실천하기로 한 것이. 이것은 틱낫한 스님의 가르침이었다. 특별히 웃을 일이 없어도 내 앞에 펼쳐진 새로운 하루를 향해 감사의 미소를 짓는다. 아침마다 잠시 억지로라도 살짝 입꼬리를 올렸을 뿐인데, 조금씩 마법이 일어났다. 밤새 굳어 있던 얼굴의 근육이 풀어지면서 걱정으로 어두웠던 마음이 께 숨을 쉬게 되었다.


통한의 눈물이 바다를 이룬다 해도
붓다의 미소만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익사하지 않을 수 있다.


틱낫한 스님 플럼빌리지에서는 수행자들이 매일 노래 부른다. "아침에 눈뜨며 나는 웃음 짓네. 새롭고 신선한 24시간이 내게 있네. 나는 서원하네. 매 순간을 충실히 살며 모든 생명을 자비의 눈으로 바라볼 것을. 나는 세상에 웃음 짓고, 세상은 또 내게 웃음 짓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더 많이 웃어야 한다. 웃을 일이 다가올 때를 기다리지 말고 그냥 먼저 웃어야 한다. 그렇게 절망 속의 고통을 돌보다 보면, 여유와 고요 속에 기쁨이 솟아나고 내면에 깊은 평화가 자리 잡는다.




H2는 이미 자신의 상황을 무한 긍정의 힘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Y는 가끔 멕시코 여행 중에 H2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와하까에서 양심적인 택시기사를 만나 먼 길을 떠난 날이었다. 이에르베 델 아구아는 석회질이 많아 샘물이 흘러내리며 굳은 침전물이 폭포의 장관을 이루는 멋진 관광지였다. 정상에 오르면 바위 균열을 뚫고 나온 물이 여러 군데 고여 멋진 인피니티 풀장을 만들어 놓았다. H2가 이곳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온천수가 아니었음에도 성큼 물속으로 뛰어들어 수영을 즐겼다.


수영을 전혀 못하는 K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Y는 물이 차가워서 도저히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수영은커녕 오히려 고산병이 걱정되어 서울서 공수해 간 팔팔정을 이미 택시 안에서 꿀꺽한 상황이었다. 이제 겨우 감기인지 독감인지 아니면 코로나인지도 모를 바이러스를 떨쳐냈는데, 다시 감기라도 걸리면 멕시코 여행은 끝장이었다. K와 Y는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아 H2사진을 찍어 주는 것만으로도 흡족하였다. 주변 경치가 하루쯤 시간을 내서 다녀가 봄직했다.


와하까의 관광지, 이에르베 델 아구아


H2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수영을 배웠다. Y는 젊어서 '즐겁게 살자'가 인생의 모토였데, 가만 보아하니 인생을 역동적으로 즐기는 데는 계절 스포츠만 한 것이 없었다. 운동은 어릴 때 배울수록 유리하다고 판단한 Y가 큰맘 먹고 겨울방학 때 매일 호텔 수영장을 데리고 다니며 개인교습을 시켰다. H2는 2m가 넘는 성인풀에 겁도 없이 뛰어들었다. 제주에서는 파고가 높은 중문 바다에서 서핑을 다. 보통 용감한 게 아니었다. 어디서든 물만 만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H2누구라도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게 만들었다. 그날도 물속에서 하루를 흠뻑 즐기고 돌아와서는 Y에게 대뜸 한 마디 던진 것이다.


"엄마! 나는 꿈을 이룬 것 같아."

"뭔데?"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그러면 꿈을 이룬 거 아냐?"

"그렇지. 그렇게 말할 수도 있네."

"엄마! 고마워. 엄마의 딸로 태어나서 고마워."

"나도 네가 엄마 딸로 태어나줘서 고맙다."

"엄마는 나 어려서부터 세상을 즐길 수 있게 많은 걸 가르쳐 주고, 내가 하고 싶은 거는 하나도 막지 않고 다 응원하고 지지해 주었어. 넘 고마워. 나는 언제나 감사하면서 살고 있어."


Y는 속으로 눈물을 훔쳤다. H2는 15살에 자기 인생을 개척한다고 훌쩍 미국으로 떠난 아이였다. 한국이라는 좁디좁은 나라에서는 답답함을 느꼈지만, 미국에 가서는 자신의 날개를 달고 자유롭게 날 수 있었다. 하지만 부모 없이 홀로 개척하는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암초가 숨어 있었을까. 래도 스스로 사서 한 고생으로 내면은 더욱 단단해졌고, 덕분에 부모의 은혜를 기억하고 틈나는 대로 표현하는 지혜가 자라난 것은 아닐까. 그 어리던 것이 어느새 다 자랐다고 생각하니 대견하고 기특해서 가슴이 뭉클했다.


 여행  H2는 새벽마다  Y를 찾아와 K가 일어난 자리로 파고들었다. 엄마를 끌어안고 뽀뽀를 하며 사랑한다고 몇 번이고 달콤한 향기를 뿌려다. 이것은 어쩌면 현재의 행복을 놓치지 않으려는 발버둥일 수도 있었다. 며칠 후면 떠나갈 부모의 사랑을 지금 흠뻑 느끼고, 마음에 차곡곡 쌓아두어야 앞으로의 여정에 힘는 것능적으로 체득한 것이리라. 여행을 하다 보면 오로지 오늘만 생각하며 살게 된다. 오랜 여행으로 H2는 현재를 즐기는 습관에 길들여졌다. 오, 카르페 디엠!! H2는 메멘토 모리에 길들여진 Y와 죽이 잘 맞았다.




마이애미에서 제일 가까운 한국 영사관은 애틀랜타에 있었다. 애틀랜타는 H2가 대학을 나온 도시이고, 또 애팔래치아 트레일의 시작점이다. 래저래 애틀랜타는 H2와 인연이 깊었다. 이제 다시 애틀랜타행을 준비하며 H2는 Y의 신용카드 사본으로 인터넷에서 버스티켓을 구매할 수 있었다. 여권이 없으니 비행기는 이용을 못하고, 13시간 이동을 해야 하는 그레이하운드 버스야만 했다. 다행히 버스는 본인 증명 필요 없, 티켓만이 유일한 과의례였다.


H2는 미국의 고속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로 향했다. 날은 이미 칠흑같이 어두워진 시각이었다. 버스의 경로는 마이애미에서 출발하여 아틀랜타로 가는 여정이었다. 다행히 터미널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대륙의 크기가 워낙 방대하기에 사방팔방으로 떠나려는 승객들이 자신의 버스를 기다리느라 북적거렸다. 인터넷상으로 H2가 탈 버스가 마이애미의 최남단 도시를 출발했다고 알려왔다. H2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레이크 워스에서는 12시 출발이었다.


대망의 12시가 되었다. 그런데 5분, 10분이 지나도 버스가 오질 않았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불길한 예감이 슬금슬금 온몸을 감쌀 무렵 시간은 새벽 한 시 훌쩍 지나고 있었다. 이제나 저제나 터미널 안에서 아틀랜타행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동요가 일었다. 인터넷상에서도 버스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오밤중에 해괴망측하게도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누군가 버스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회사에서는 운전자와 연락이 닿질 않는다는 통보만 되풀이하였다. 용무를 안고 먼 길을 떠나려던 사람들의 발이 묶이고 있었다. 벽 2시가 가까워지평소 대범한 H2도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애틀랜타에는 갈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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