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냥 보자 말자 “넌 나랑 오랜 인연이 될 거야”라고 점을 찍어 두었다. 로저스에 따르면, 누구나 자신이 꼭 되고자 하는 방향으로 추진한다는 자기실현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이것 또한 자기실현이다. 너무 좋아하면 너무 싫어지는 법이라 난 속으로 좋아했지 겉으로 호들갑을 떨거나 표시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묵묵히…
울산지역에 눈이 펑펑 내리던 날, 하얗게 눈은 내리지만 소복소복 쌓일 때는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결국 차도는 막히고 도보도 미끄럽기 그지없었다. 빙판길을 헤치며 우리는 만나기로 했다. 어떻게 만날까 궁리를 하다가 30분 거리를 걸어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운동화를 신고 빙판길을 걸어가는데 정말 여러 번 넘어지고 옷이 다 젖어도 기분 좋았다. 눈 내린 뒤, 신속히 기온이 떨어져서 귀가 얼얼하도록 춥다. 그래도 그녀를 만나기 위해 빙판길을 걸어갔다. 커피 한잔 사이에 두고 남편얘기, 자녀얘기, 사례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담화를 나누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갔지만 마음은 훈훈했다.
6년 전, 나는 위기에 빠졌다. 이 힘든 고비를 누구와 함께 나눌까 생각하다 문득 그녀가 생각났다. 밤 11시, 난 그녀를 불러냈다. 밤이 늦었다고 핑계 대지 않았다. 거절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뽀르뚜가’라 말하고 싶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서 주인공 ‘제제’처럼 힘들 때, 아플 때, 고통스러울 때, 생각나는 그녀, 서슴없이 '뽀르뚜가'라 말하고 싶다. 우리는 차 안으로 들어갔다.
퇴근 후 겸업으로 모상담센터에서 객원상담원으로 2년 동안 일했는데 그곳에서 한 사례를 본인과 부모 동의를 얻고, 익명처리를 하고 안전하게 공식적인 상담사례발표회를 가졌다. 그중 이상한 한 사람이 나의 사례를 들고 모상담센터 소장에게 갖다 줬다. 그 소장은 발표하는 도중 전화가 왔고 발표장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소장이 나보고 말했다.
“나의 상담센터를 말아먹으려고 작정했나? 나의 모가지를 치려고 작정했냐?”
“소장님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저는 내담자와 부모님께 분명히 허… “
“왜 함부로 허락도 없이 사례를 쓰냐? 내담자나 부모가 알면 어쩌려고 그러냐? 우리 상담센터 문 닫고 싶으냐? 지금 제정신이냐. 잘못했다고 사과해라.”
“정말 너무하십니다. 그렇지만 허…. ” 계속 말을 잘랐다.
“암튼 이 계기로 반성하고 내가 했던 말을 잘 새겨듣고 반면교사로 삼아라.”
“…”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기가 막혔다. 이 외에도 수많은 얘기들로 상처를 줬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
내담자와 부모한테 허락받지 않았다고 오해를 한 것이다. 나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무조건 자기 말만 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일명 교수라는 사람이 위기상황 대처능력은 형편없었다. 그런 식으로 처리하지 않아도 충분히 방법이 있을 텐데 말이다. 나에게 퍼부었던 말들이 상처가 되어 가슴이 찢어 질듯이 아팠다. 그분은 말을 하고 나면 그뿐이지만, 난 고스란히 뇌리에 남았다. 이 일로 신체화증상까지 생기면서 우울해졌다. 생각만 해도 온몸이 경직되면서 머리가 아팠다. 그 격정적인 분노를 쏟아놓고 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는 하릴없이 들어주고 아무 말 없이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녀는 말했다. “이 또한 다 지나갑니다. 제가 지켜줄게요. 언제든지 순희쌤 편이에요.” 둘은 말없이 한참 침묵을 삼키면서 함께 울었다. 자정이 넘어 집으로 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미안함과 고마움이 몰려왔다.
그다음 날 문자가 왔다. “순희쌤 지금 기분 어떠셔요?” 이 한마디가 나의 온몸을 따스하게 감쌌다. 그리고 한 달 후 원목으로 예쁜 트레이 쟁반을 만들어 직접 그림까지 그려서 나에게 선물을 했다. 나를 감동시킨 트레이 쟁반,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다. 이것뿐만 아니라 두 칸 수납장을 만들어 또 선물을 주었다. 취미생활로 이것저것 만들다가 순희쌤 생각이 나서 정성 들여 만들었다고 했다. 마음이 참 따신 분이다. 난 뭘 줬지? 분명 나도 그녀에게 준 게 있으리라.
그녀가 나에게 준 선물, 정성이 가득한 선물 잊을수가 없어요.
우리는 각자 열심히 살다가 가끔씩 연락한다. 잊어버릴 만하면 연락을 해서 서로 안부를 묻는 사이, 가끔 만나도 엊그제 만난 것처럼 할 얘기가 많은 사이. 13년의 세월이 지나고 보니 각자 길을 잘 선택한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학교로 발령받았고, 그녀는 '가족상담소'를 차렸다. 나는 정년퇴임이 3년 남았지만, 그녀는 정년퇴임이 없는 가족상담소 소장이다. 현재 그녀와 커플이 되어 가족, 부부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둘이 의논하지 않아도 우리는 손발이 척척 맞아떨어진다. 이심전심 느껴지는 나의 뽀르뚜가, 이번주 금요일 가족상담하러 간다. 그녀는 또 나를 환하게 반겨줄 것이다. 커플링 반지처럼 우린 커플 상담사이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읽고 나니 '제제'어머니가 했던 말이 계속 떠 오른다. 그녀와 내가 상담일을 하는 것도 운명을 타고 난 걸까?
모두가 다 자신의 운명을 안고 태어나는 법이야.
2023년 2월 2일 목요일 그녀를 우리 집에 초대했다. 가슴이 두근두근...
그녀는 흔쾌히 즐거운 마음으로 오기로 했다. 이때부터 신이 났다. 특별히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좋다. 음~ 일단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집에 도착하면 '원적외선 디톡스 사우나'를 함께 하고, 두 번째 '아로마테라피로 척추 마사지'를 해주고 따뜻한 방바닥에 눕혀놓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자유연상법'으로 어릴 적 얘기를 끄집어내면서 서로 치유하게 했다. 우린 이미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자동 실습이 되었다. "아! 서로가 연결이 될 수밖에 없구나." 그녀가 나를 편안하게 여기는 이유도 알게 되었고, 나도 그녀를 어머니로 연결하여 따뜻함과 포근함을 느끼는 나를 보았다. 이뿐만 아니라 그녀가 나에게 게슈탈트 상담기법 중 '욕구와 감정자각'까지 서로 실습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오늘도 빈손으로 오지 않고 포장지에 돌돌 말아서 짠~ 내놓는 손수 만든 '퀼트 벽걸이 선물' 내 방문앞에 바로 걸었더니 '캘리심리상담연구소'와 너무 잘 어울렸다.
"아마도 나에게는 엄마가 산 같은 분이었고 따뜻한 분이셨는데 그 엄마와 연결이 되었으니 쌤이 더욱 좋은가 봐요. 말하다 보니 또 눈물이..."
"(사랑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음... 네... "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쌤은 저를 보면 어때요?"
쌤을 보면 뭔가 아버지 같은 이미지가 풍겨요. 아버지는 무엇을 해도 한 번도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기다려주고, 다독여 주는 아버지. 음식을 해도 무조건 맛있다. 심부름해도 늘 잘했다... 고맙다 이렇게 격려 지지를 해 주었기 때문에 좋은 이미지예요. 쌤이 평가하지 않는 그것이 평안하게 하는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