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을 달라는 말이 그렇게 슬픈 거였어?

-읽는 라디오

by 하쿠나 마타타

오프닝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는 핑계로 아메리카노 대신 달달한 라떼를 시켰습니다.

사실 그냥 라떼가 마시고 싶었습니다. 구름은 핑계고요.

굳이 핑계를 대지 않아도 되는데 핑계를 대고서 하는 행동들이 얼마나 있으세요?



음악

-김건모 (핑계)

(50) (1993) 김건모 - 핑계 [싱크가사/Lyric Video] - YouTube



사연

너무너무 울고 싶은데 엄마, 아빠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며 이유를 물어볼까 봐 꾹꾹 참고 있는데 옆에서 오빠가 한마디 했습니다.

“어이~못난이 책상 위에 연필 좀 줘봐.” 이 말을 듣고 눈물이 터졌습니다. 그것도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도 장난을 잘 치는 오빠지만 제 눈물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오빠였죠. 그날도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제가 울어버리니 오빠는 당황했고, 벌떡 일어나서

“왜 울어? 오빠가 못난이라고 해서 그래? 못난이 아니야, 그럼 못난이 아니고 이쁜이지. 세상에서 제일 이쁜이.”라고 하면서 달래주는데 저는 더 크게 울었습니다.


분명 오빠 때문이 아닌데 오빠 앞에서 아무 말하지 않고 울었습니다. “니가 저번에 갖고 싶다는 가방 줄게. 눈물 그쳐.”라는 말을 듣고 “진짜?”라고 되물으며

오빠의 확답을 듣고 눈물을 그쳤습니다.

사실 울만큼 울어서 이제는 멈춰도 될 거 같은 생각이 들었던 참이었거든요. 오빠는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동생을 울린 오빠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무 잘못 없는 오빠는 타이밍을 잘못 맞추는 바람에 동생의 눈물 앞에서 아끼던 가방을 강탈당했습니다.


저는 가방을 받고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 가방으로 인해 왜 울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오빠의 ‘못난이’라는 말 때문이 아니라는 거라는 건 확실하지만.


그때는 그래도 되었습니다. 다섯 살이나 어린 동생을 끔찍이도 여기는 장난기 많은 오빠에게 아주 가끔 써먹는 필살기라는 걸 지금도 가족들이 모이면 말하곤 합니다.


지금은 그런 핑계를 댈 만한 곳이 많이 없습니다. 나의 투정을 받아줄 사람이 어떤 마음일지는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요.


남편에게 가끔 푸념은 하지만 그것도 마냥 편하지 않습니다. 오빠처럼 뭘 준다고 하지도 않고, 그저 지켜봐 주고, 휴지를 건네주는 것이 전부니까요. 뭐가 생기지 않아서 편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제가 별거 아닌 일에 속상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남편의 모습이 안쓰러워서 불편합니다.

이게 피를 나눈 가족과 그렇지 않은 가족의 차이인지,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핑계를 대는 사람은 비겁해 보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솔직한 감정과 행동이 전부 옳다고 믿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과거형입니다.

사실 지금도 이 생각이 완전히 바뀐 건 아니지만 핑계를 대는 사람을 비겁하다고 핀잔을 주기보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지 않을까'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되고, 그 사람 입장에서는 이 선택이 최선이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는 오지랖도 부려봅니다.

평소에는 안 그러는 사람이 딱 한번, 그 한 번이 이번인데 하필 그 모습 앞에 내가 있었던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해봅니다.


핑계를 대지 않아도 울고 싶으면 울 수 있고, 매번 그럴 수 없지만 가끔은 속상한 일이 있으면 “나 속상한 일이 있었어. 그러니 위로해 줘.”라고 말할 상대가 있으면 그래도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요?

핑계 대지 않고 나 자신에게 솔직한 모습을 보여줘도 괜찮다고 믿습니다.


음악

-정은지 (하늘바라기)

(50) [MV] Jeong Eun Ji(정은지) _ Hopefully sky(하늘바라기) (Feat. 하림) - YouTube



클로징

각자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도 오빠가 여동생을 바라보는 시선은 변함없습니다. 눈에서는 꿀이 떨어지지지만 '못난이'라고 부르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가방을 강탈한 어린 동생은 오늘 갑자기 오빠에게 미안해집니다.

오늘도 수고 많았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많은 행복을 만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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