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햇살 코치 Jan 07. 2022

육남매 첫 여행

함께 나이들어가는 남매들

육남매의 막내인 나와 큰오빠는 18살 차이가 난다. 큰오빠는 군인 출신으로 7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각종 자격증 시험에 도전하고 건물 소장으로서 새로운 일을 하며 활기차게 지내고 있다. 여행을 좋아해서 국내와 해외 곳곳을 누비며 다니셨고, 동생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오랜 소망이었다. 그리고 올해 초 드디어 그 숙원을 이루었다.


큰오빠에게 큰언니는 가장 아픈 손가락이다. 시골의 가난한 집안 장남인 오빠를 위해 큰 언니가 양보한 것도 있고 오랫동안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동생이 항상 안쓰러웠다. 동해안 여행을 하자는 말에 밝게 웃는 언니의 모습을 보며 올해 생일에는 꼭 함께 여행을 가리라 마음먹었다고 한다.


“오빠가 동해로 여행 가자고 하는데 다녀와도 돼?”


아이들이 어려서 아직 손길이 필요한지라 남편과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했고, 가족들의 지원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큰오빠, 큰언니, 셋째 오빠와 함께 2박 3일 일정으로 동해 여행을 떠났다. 둘째 오빠와 돌째 언니는 아직 직장을 다니고 있고 코로나로 인해서 모임이 제한되어 이번 여행은 아쉽게도 함께하지 못했다.




고속도로로 가면 두 시간이면 갈 거리를 동생들에게 멋진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 큰오빠는 국도를 따라 굽이굽이 태백산맥을 넘었다. 차 안에서 ‘하하 호호’ 이야기를 나누다 멋진 풍경이 나오면 멈춰서 구경하고 사진도 찰칵찰칵 찍었다. 점심 먹고 출발해서 밤늦게 강릉 숙소에 도착했지만,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침에 일어나 푸른 동해의 머나먼 수평선 위로 떠 오르는 붉은색 해를 보니 가슴속에서 설렘이 느껴지고 푸른 하늘 높이 올라 황금빛을 내뿜는 태양을 보니 속이 탁 트였다.

전에도 동해안을 몇 번 와보긴 했는데, 동해가 이렇게 맑고 에메랄드빛이 나는 줄은 처음 알았다.


여행 중 가장 인상적인 곳은 양양 낙산사다.

날씨가 화창한 휴일이라 그런지 코로나임에도 불구하고 입구부터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차를 타고 언덕을 오르니 주차 요원이 수신호로 안내를 한다. 운전자인 큰 오빠만 차에 남고 우리 셋은 내린다. 한쪽에 호떡을 파는 트럭이 보인다.


“xx야, 배고프지 않니? 우리 호떡 사 먹을까? 오빠가 사줄게.”


셋째 오빠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호떡 4개를 사서 하나씩 입에 문다.

호떡이 뜨거워 호호 불어가며 한입 베어 무니, 말랑말랑한 식감이 느껴지며 속에 있는 꿀이 흘러나와 달콤함이 입안 가득 풍긴다. 그리고 사이사이 톡톡 씹히는 씨앗들이 고소함을 더한다. 오빠는 호떡을 두 개 더 사서 주차하고 나오는 큰 오빠에게 하나를 건넨다. 

세째오빠는 몇 년 전 위 수술을 해서 쉽게 배가 고프다. 함께 여행하며, 쉽게 허기를 느끼는 모습이 보여 마음이 좀 아프다.


낙산사에는 볼거리도 사람도 많았다.

‘언니는 내가 챙겨야지.’

나는 언니 손을 꼭 잡고 오빠들 뒤를 따라 걸었다.


의상대사가 기도했다는 의상대를 지나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세워진 홍련암에 가서 환상적인 동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에메랄드빛 바다와 바닥이 다 보일 정도로 맑은 물이 보기만 해도 눈을 깨끗이 씻어주는 듯 상쾌했다.

“막내야~, 여기다가 그동안 힘들었던 마음이 있으면 다 버려버려.”

큰오빠의 말처럼 ‘철썩철썩’ 파도 소리와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마음속 찌꺼기가 다 사라지는 듯 홀가분했다.



우리 사남매는 기념사진을 남기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해수관음상’을 보러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평소보다 많이 걸어서인지 체력이 떨어지면서 어지럼증이 나타났다. 여행 직전에 아파서 며칠 동안 앓았는데 언니 오빠들과 가는 첫 여행이라 조금 무리가 되었지만 출발한 터였다. 다리가 퍽퍽해지는 느낌이 들 즈음 눈앞에 수십 개의 돌계단이 보였다. 저 계단을 올랐다가는 남은 일정을 소화하기가 어렵겠다 싶고 엄두가 나지 않아 망설이다 오빠에게 말을 건넸다.


“오빠! 해수관음상 보고 어디로 내려오실 거예요? 저는 아까 지났던 찻집 앞에 가서 기다릴게요.”

그러자 오빠들이 놀라서 물어본다.

“아니, 왜?”

“어지러워요. 체력이 달려 쉬는 게 좋겠어요.”

“에고, 막내가 아주 힘들구나.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해수관음상은 보고 가야지. 오빠들이 손잡아 줄 테니까 천천히 올라가자.”


큰오빠는 오른손을, 셋째 오빠는 왼손을 잡아주었다.

‘하하하, 웬 호강이란 말인가. 아이들을 챙기느라 양손을 잡고 걸은 기억은 있으나 누군가가 양손을 잡아주며 챙겨준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오빠들이 양옆에서 손을 잡아주니, 마치 보디가드를 둔 양 든든하다. 양손에서 오빠들의 온기가 전해지면서 가슴이 따듯해지고 마치 바람이 빵빵하게 차오르는 풍선처럼 가슴이 꽉 차며 힘이 쑥쑥 생겨났다.

이 느낌은 두고두고 간직해 소중히 꺼내보고 싶다.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니 위로 올려보면 고개가 아플 정도로 크고 높은 관음상이 보였다. 높이 올라오니 바람은 더욱 시원하고 멀리 보이는 동해와 수평선, 끝도 없이 펼쳐지는 해안선이 장관이었다. 속이 뻥 뚫리는 것 같다.


고즈넉한 낙산사 경내도 한가롭게 둘러보고 찻집이 있는 입구로 되돌아왔다.


큰오빠를 보니 훤칠한 키와 체격, 흰머리에 검버섯이 피어난 얼굴이 영락없이 20년 전 보았던 나이 드신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오빠가 많이 늙었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짠했다. 그러고 보니 큰언니와 셋째 오빠의 흰머리와 주름도 눈에 들어왔다. 큰오빠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어린 아이 같아 애처로운 막내가 지천명에 이르렀으니 두말하면 무엇하겠는가.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사관생도 제복을 입고 서울에서 내려온 멋지고 늠름한 오빠의 모습이 생생하다.

“오빠들이 손잡아줘서 잘 봤어요. 안 올라갔다면 후회할 뻔했어요. 고마워요,”

“나중에 나 늙으면 오늘 손잡아줬던 거 기억하고 내 손도 잡아줘야 해.”

유머 넘치는 큰 오빠는 웃으며 말했고 우리 모두 한바탕 웃으며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셋째 오빠가 물었다.

“나는 오빠로서 어때? 너한테 좋은 오빠야?”

“그럼~ 좋은 오빠지.” 나는 오빠의 생뚱맞은 질문에 당연한 듯 대답했다.

“무언가 해주는 게 없어도 괜찮아?”

“괜찮지. 꼭 뭘 해줘야 해?”

오빠의 질문에 답하고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오빠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고, 오빠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오빠는 나를 사랑하잖아?”

“그렇지. 오빠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분명하지.”

“그거면 나는 충분해. 내가 오빠에게 무언가를 해주지 않아도 좋은 동생이라 생각하는 것처럼 나도 그래.”

동생에게 무언가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듣고 조금 놀랐고, 오빠에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어서 좋았다. 


큰오빠는 특히 마음에 짐이 많다. 장남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고 우애를 강조하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장남으로서 동생들을 보살펴야 한다’라는 생각이 너무 강하다. 그런데 오히려 그 생각에 묶여 자유롭지 못하고 미안한 마음만 키우는 모습이 보기에 안타깝다.

국가에서 산아제한이 한창이던 초등학교 때는 형제가 많은 것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철없던 학창 시절에는 언니 오빠들에게 불만도 있었다.


‘왜 우리 언니 오빠들은 나를 더 많이 사랑하고 관심 가져주지 않지?’


당시에는 부모님과 언니 오빠들이 무언가를 해주면 당연하다 여겼다. 그리고 받은 것보다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고 아쉬워했다.


내가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다는 생각은 허기진 아이처럼 공허하고 외롭고 슬픈 느낌을 만들었다. 부족한 나 자신을 채우기 위해 더욱 열심히 성취에 매달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알게 되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당연한 것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 부모의 책임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고 감사한 것이었다. 그러고 나니 내가 가진 것과 부모님과 언니 오빠들에게 받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가족에게 사랑을 참 많이 받았구나.”

생각이 바뀌니 마음이 충만하게 채워지고 행복과 감사가 느껴졌다.


막내라서 나는 참 홀가분하다. 그런데 언니 오빠들은 동생들에게 무언가를 해주지 못해 마음 한쪽을 혹은 대부분을 미안함으로 채운다. 그 마음이 전해질 때면 나도 괜히 마음이 무거워지고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그런 마음 안 가져도 되는데……. 언니 오빠들이 행복하게 살면 되는데…….’

아무리 100세 시대라 한들,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 육남매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마음을 나누며 지내면 충분하다. 오빠 언니들도 ‘오빠’, ‘언니’라는 옷을 벗고 ‘나’로서 가볍고 행복하게 살면 좋겠다.

육남매가 다 함께 가는 다음 여행이 기다려진다.


이전 08화 엄마에게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