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7.
날이 개었다.
며칠 동안 쉼 없이 내린 비가 멈추고
해가 났다.
날씨는 맑은데 별로 따뜻하지는 않다.
예년 같았으면 그 비가 눈이 되어 내렸겠지.
비와 헤어진 바람은 점점 차가워지고
땅을 적시던 빗물은 단단하게 얼어붙었다.
넘어질까 조심스레 걸음을 내딛는
발길이 아른거렸다.
얼굴은 안 보여도 표정은 다 느껴진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창문엔
눈보다 더 하얀 김이 빼곡히 서려 있었다.
P는 얇은 도화지처럼 엉겨 붙은 얼음막을
손으로 긁어내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1년 동안 다닌 물류센터를 그만두고
지난달부터 집에서 쉬고 있다.
허리가 너무 아팠다.
돈은 조금 모았지만
대가가 너무 컸다고 할까.
요령은 없었는데 의욕은 앞서다 보니
무리를 한 듯하다. 나중에는
일이 몸에 익었는데
몸이 그만큼 따라주지 못했다.
함께 일한 사람들은
나쁘지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다.
뭐, 언제까지나 쉴 수는 없지.
아직은 자립수당을 받고 있지만
몇 년 후면 이것도 끝이니까.
월세도 내야 하고.
만 18세, 너무 어린 어른이었던 P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처음 사회로 나와서
전세임대주택을 알아보다가
일자리가 먼저 구해져
일단 직장 근처에 방을 얻었다.
집 구하기가 이렇게 어려울지 몰랐다.
몇 번의 실망과 발품을 품은 끝에
지금 사는 보금자리를 구했다.
지하철역과 거리가 좀 있는
허름한 반지하 원룸이었지만 화장실도 있고
주인이 좋았다. 사회에서 만난 어른 중 제일 나았다.
P를 무시하지 않았고 보증금도 조금 깎아 주었다.
P가 세 살부터 살던 시설을 떠난 건 2년 전이었다.
그동안 정도 많이 들어 눈물도 많이 흘렸다.
P는 보호종료아동, 또는 자립준비청년이라 불렸다.
P는 자신이 껍질 벗겨진 반숙 달걀 같다고 느꼈다.
겉은 반지르르해도 속은 덜 익은 상태.
반기는 보금자리 없이 삶이 힘들 때마다
P의 마음은 노른자처럼 흔들거렸다.
하루를 마치고 자리에 누우면
밀물처럼 슬픔이 몰려올 때가 있었다.
왜 나는 다른 가정처럼 부모가 없었을까.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자랄 순 없었을까.
울다 지쳐 잠든 날이 많았다.
그런데 언젠가 P의 마음속에 이런 말이 들렸다.
"지난날은 이미 지나버렸어. 내일은 아직 안 왔고.
힘들겠지만 지금은 지금 일만 생각하자."
누굴까, 이런 말을 해준 사람은.
"그래, 일단 푹 자고 일어나자. 밥도 잘 먹고."
P는 물류센터에서 일하며 참 다양한 상자를 마주했다.
크기도, 무게도, 내용물도 제각각인 박스 천국.
사람 사는 모습이 이런 게 아닐까.
나의 삶과 너의 삶이 같지 않지만,
그렇다고 내가 못난 건 아니야.
물건마다 배송지가 다르듯
서로의 길이 다를 뿐,
그리고 속에 품고 있는
꿈이 다를 뿐이지.
아무리 작은 상자라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선물이듯."
생활이 쉽지 않았지만 P는 꿈이 있었다.
열 살 즈음이었을까.
시설에 정기후원을 하던 분이
직접 방문한 날이었다.
작은 중국집을 운영하던 그분이
직접 만들어 주신 자장면이
정말 맛있었다.
아, 마음속 깊이 사무치던 감칠맛!
짜장면은 아직 표준어가 아니던 시절,
그날의 맛과 기쁨은
지금도 P에게 힘이 되고 있다.
P는 자기도 그런 요리사가 되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다음 달부터는 한 단체에서 후원하는
자립준비청년 지원사업에 참여한다.
지금도 연락을 하는 시설 원장님이
내용을 알려주시고 추천도 해주셨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대상자에 선정되었다.
P는 이 기회를 잘 살려보고 싶었다.
오늘은 비가 멈췄으니 산책을 좀 해볼까.
오랜만에 도서관도 들러서 요리책도 좀 봐야지.
여전히 추운 겨울의 늦은 오전,
차갑지만 밝은 햇살이
길을 나선 P의 머리 위에서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