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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횬 Mar 31. 2024

질문

답이 없는 질문은 어떠세요?


질문
알고자 하는 바를 얻기 위해 물음.


“저는 지금 제 나이가 참 좋아요. 마흔은요,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은 작아져요. 그동안의 경험 때문이겠죠. 제 나이의 숫자는 경험의 크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인터뷰하며 입술이 연신 실룩거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음과 다른 말을 할 때, 입술의 실룩거림을 나는 알고 있다. 영상을 곧장 체크하러 갔다. 카메라 영상 안에서 실룩거림은 찾아볼 수 없었다. 미세한 입술의 움직임마저 나는 속이고 있었다. 스스로 감탄하며 멋쩍어 양옆으로 시선을 이동하며 괜히 두 팔을 높이 들어 스트레칭을 했다.        

   

“그 경험 안에는 성공도 있었지만, 실패와 슬럼프, 번아웃도 있었어요. 그것 또한 도전했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죠.” 이번에는 실룩이지 않았다. 진심이었다. 마흔넷이란 나이가 좋지 않았다. 다시 스무 살, 서른 살로 돌아가고 싶었다. 마흔이 무거운 나에게 이제는 무언가를 도전하는 것은 두려움이다. 체력도, 열정도, 창의적인 생각도 여름날 초록 잎이 가을의 찬바람에 회갈색으로 변하듯 싱싱함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변화에 자연스레 스며들지 못하고 일부러 애쓰고, 오랜 시간을 공들여야 알게 된다는 것, 월, 화, 수, 목, 금요일을 보내고 난 후 토요일이면 오전에 가벼운 활동을 한 뒤 오후 내내 이불속에서 잠을 푹 자야 체력이 회복된다는 것, 어느 날부터 그랬다는 것이 내 나이를 무겁게 만들며 싱싱함이 빛나던 젊은 날들을 그립게 한다. 마흔의 나는 젊은 시절 나에게 깊은 자격지심을 느끼며 정상에서 잘 내려가는 예쁜 그림을 그려본다.      


일에 빠져 지낸 날들, 일이 좋아서였기보다 그것이 아니면 내가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그날 이후 한 번씩 잊을만하면 밤마다 어딘지 모를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바닷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바닥의 감촉과 공기의 스며듦이 적당히 부드럽고 어느 지점에서는 까슬거렸다. 마치 그것은 여름날과 같았다. 얼음 알갱이가 혀의 감촉에 그대로 느껴졌지만 닿자마자 녹는 슬러시와 같았다. 그것을 온몸으로 음미하며 오랫동안 걸었다. 목적지는 없었다. 다리에 감각이 점점 옅어지며 나는 바닷가의 모래알로 습한 공기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아직 자유로운 두 손으로 다리를 붙잡아 보지만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몸 전체가 끝이 없는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무서운 속도로 빨려 들어가며 생각했다. 그 장면 안에 없는 어떤 사람이 이야기하듯, 내 마음이 무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좋아, 또 시작했어. 한번 해보지 뭐’, 손가락을 움직여 보지만 그것은 마음이 할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몸을 뒤흔들어 보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리를 질러보아도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꿈속에서 혼자 어딘지 모를 곳을 걸을 때면 늘 그렇게 신체 어느 부분이 사라지며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어느 날은 제법 빨려 들어가는 시간이 길어 내 안에 두려움이 점점 더 커졌다.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고 소리를 내 질렀다. “아악!” 순간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며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가위눌림, 그날 이후 시작된 가위눌림이 한동안 잠잠하다가 어느 날은 매우 강도가 높게 나타나 두려움에 떨게 했다. 머리맡에 있는 시계를 손으로 더듬거려 겨우 찾아 시계의 램프를 켜 시간을 확인하면 늘 새벽 3시 40분경, 비슷한 시간에 두려움이 찾아왔다. 오늘 밤도 그랬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머리카락 한 가닥이라도 바깥으로 나갈 새라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잘 쓸어 이불 안으로 가지고 와 무릎을 가슴 쪽으로 당겨 붙이고 옆으로 누웠다. 하룻밤 동안 두세 번 가위눌림의 경험이 있어 혹시 또 그것이 올까 봐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잠이 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리고 방금 전 느낀 바닷가로 추정되는 곳을 걸으며 온몸에 닿았던 생생한 감각을 떠올려 본다. 그것은 편안한 듯 불쾌했다. 그러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 창 밖의 공기도, 집 안의 공기도 톡 쏘는 차가움이 땅속으로 흡수된 것 마냥 이상하게 따뜻한 일요일 아침이다. 가위눌림 때문이었을까? 마음 안에 꿈에서 느낀 까슬함이 남아서였을까? 몸 전체가 돌이 된 듯 단단해져 편안하지 않다. 어쩌면 차갑고 냉랭한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따뜻한 공기에 틈을 내줄 수 없을 만큼 냉기가 꽉 채워져 있다. 현재에 있지만 지금에 머물지 못하는 사람이 된 듯 내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마음에 틈을 만들려 숨을 내쉬었다 깊이 마셔본다.           


“휴”     

“흐읍”          


햇살은 불편한 마음을 달래려는 걸까? 어느 날보다 따스하게 창을 투과해 이불 위에 닿는다. 순간 이불이 주는 위로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이불 밖으로 나오려 애쓰지 않았다. 따스한 감촉이 좋아 한참을 머물렀다. 눅눅함이 없는 적당히 까슬거리는 질감이 밤새 시달린 꿈에서의 불편함을 달래주었다. 오늘도 전시회 인터뷰가 있는 날이다. 이불을 걷어 발밑에 두고 앉았다. 그 순간 내 온몸의 감각들은 이불을 걷어냄을 아쉬워한다. 그것을 눈치채곤 곧장 내 마음에 질문했다.   

  

‘나는 이제 괜찮아진 건가?’


어젯밤 가위눌림 때문이었을까? 한동안 잠잠했던 감정이 불쑥 치밀어 오른다. 그것을 누르기 위해 두 손을 모아 쇠골뼈 중앙으로부터 가슴 명치까지 아래로 힘을 주어 여러 번 쓸어내렸다. 눈 주위가 뜨거워지며 금세 붉어지더니, 계획에 없던 미지근한 눈물이 볼을 지나 입술에 닿았다. 입술 틈을 비집고 들어간 눈물이 가슴으로 흘러 들어갔다. 생각조차 할 수 없게 치열하게 보낸 시간은 생각하지도 못한 곳으로 나를 보내주었다. 열심히 그리고 또 그렸다. 누군가는 가능하지 않다고 했던 일 년의 전시회 횟수가 나에게는 삶의 숨구멍이었다. 삶의 숨구멍이 커진 것 같아 나에게 괜찮아졌냐고 질문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나는 아직 괜찮지 않다. 그날의 감정은 바로 어제인 듯 온몸으로 느껴지고 그 자리에 그대로 곪아 있던 상처가 얼굴을 내민다. 그 생각을 일부러 없애지 않고, 자유롭게 떠돌게 하니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졌다.     


‘아직도 생각나는 거야?’

‘괜찮아진 줄 알았네.’    

“여보세요? 편집장님, 죄송해요.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인터뷰를 미뤄야겠어요”  

               

 세상에 흔적을 지우고 몇 년을 그림만 그렸다. 붓끝에 닿은 마음들은 내 안에서 불쑥불쑥 떠오르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그것은 정답은 아니었다. 답이 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며 그림만 그렸다. 답이 없는 질문들이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답을 찾기 위해 몰입을 하였지만, 이내 그것은 답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애써 그것을 만들기 위해 몰입을 했다. 1년이 지나자, 작품들이 쌓여 그것을 세상에 내놓고 싶어졌다. 의도한 것이 아니었지만 내 답들은 누군가의 마음에 닿거나 시선을 끌었고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수북이 쌓였던 작품들이 누군가의 곁으로 떠나고 이제 몇 작품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나는 지금 붓을 놓고 있다. 이제 괜찮아졌다고 생각하니 질문을 하지 않게 되었다. 질문을 하지 않으니, 답을 찾기 위한 몰입, 답을 만들어 내려는 몰입은 더 많이 애써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애씀은 가식적인 것처럼 느껴져 붓을 놓았다. 그리고 지난 인터뷰에서도 그것을 느꼈다. 입술의 실룩거림, 오늘 인터뷰에서는 왠지 그것이 들킬 것만 같아 불안했다. 인터뷰를 미루고 이불을 다시 끌어당겨 그 안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어젯밤 가위눌림의 느낌이 온 감각을 불편하게 했다. 나는 아직 괜찮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니 다시 질문이 떠오른다.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오늘은 꽤 괜찮게 느껴졌다. 이불 안에서 나와 커튼을 젖혔다. 햇살이 유난히 눈이 부셔 한 손을 들어 눈 아래 그늘을 만들고 커피를 마시며 연둣빛 잎들이 반짝이는 것을 본다. 그리고 다시 답을 만들기 위해 나는 붓을 들었다. 답답할 때마다 밤을 새워가며 했던 일을 다시 하기로 마음먹는다. 모네의 작품을 사랑한다. 그의 작품을 사랑스러운 마음과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감성이 촉촉하게 채워졌고, 마음은 부풀었다. 특정 순간의 빛과 그림자, 색채의 표현, 장면의 일시적인 느낌을 전달받으며 행복했다. 흐릿해 보이는 그림들이 나에게는 선명했다. 하지만 사건이 터진 후 시선이 달라져 작품 앞에서 실컷 울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을 선명하게 그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흐려져 있는 장면에서 답을 찾고 싶었다. 더 이상 선명해 보이지 않는 그의 작품을 선명하게 하면 지금 나에게 닥친 상황에 대한 답도 선명해질 것 같았다. 그렇게 최대한 유사한 색감을 만들어 선명하게 장면을 묘사하니, 내 그림은 인상주의 화풍에서 크게 벗어나 완성되었지만 속은 후련해졌다. 오늘 나는 다시 그 작업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인상파 화가들은 자연에 검은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검은색을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좋았다. 빛이 사라져도 또 다른 빛들에 의해 세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에 밤도 완전한 검정이 아니다. 그의 작품 중 '푸르빌 절벽 산책'을 선택했다. 파란 하늘, 에메랄드빛 바다, 높은 절벽, 나는 그곳에 있고 싶었다. 그의 짧은 붓놀림에서 느껴지는 에너지와 생기를 받으며 한참 그림 앞에 머물렀다. 그리고 유사한 색감을 만들어 선명한 형상으로 그려나갔다. 두 밤을 새워 완전히 다른 느낌의 작품이 완성되었다. 절벽 위에는 바람이 불고 있고, 바닷빛은 에메랄드빛이었지만 모네의 화풍은 사라지고 선명한 답이 그려졌다. 나는 5년 전 그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아직 벗어나지 못했고,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상처는 시간이 지나며 옅어졌지만, 상처의 흔적은 그대로였다. 수채화로 새로운 화법을 만들게 된 것은 물감이 물에 녹으며 내 안의 무언가가 옅어지는 듯했다. 마음은 차분해졌고,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다. 깊은 곳까지 박힌 상처의 색을 흔적 없이 지우려면 얼마나 그려내야 할까? 평범해진 듯 보이는 내 삶, 그 안에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서 있지만 아직 위태위태하다. 아직 어제와 같은 이야기들이 곁에 머문다. 그리고 내 곁에는 그가 있다. 어제와 같은 이야기들이 흩어지길 바라며 나를 기다린다. 


이제 그에게 가야할 때다.      

 

 

출처. Cliff Walk at Pourville |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artic.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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