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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횬 Apr 08. 2024

위로


위로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슬픔을 달래줌 



아침 6시에 일어나는 일은 꽤 괜찮았다.가장 좋은 것은 새벽에 밝아오는 희미한 빛이 선명해지는 것이었다. 속이 다 후련해졌다. 흐릿한 시선이 맑아지는 순간과 마주하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주 오랜전이지만 내 선택을 기억하고 있는 누군가에 의한 용기였다. 그것은 위로였다. 세상에는 어쭙잖은 위로들이 많다. 감이 좋은 나는 그것을 잘 안다. 그 위로에 담긴 공감의 퍼센트를, 1프로도 안되는 얕은 공감을 가지고 자신도 속이며 상대를 위로하는 누군가들과 수도 없이 만났다. 그는 나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저 예전의 나를 끄집어 냈다. 계속해서. 


그: 선택이 어땠어?

나: 너무 완벽했어. 새벽 여명에는 어떤 에너지가 있는 것 같아. 뭔지 모르겠지만, 심장을 뛰게 해.

그: 완벽하단 이야기에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심장까지 뛰게 한다니, 나도 한번 그 선택을 해볼까 싶네.

나: 추천해.

그: 언제나 네 선택은 그랬었어. 즐겁게 했고, 에너지를 받게 했어. 항상 난 두근거렸고…,


다시 꽤 괜찮은 사람이 된 듯했다. 그와 통화를 할 때면 나는 지금의 현실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왜 꿈속에서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있지 않던가? 그랬다. 9시가 되어 그의 전화가 울리지 않으면 내가 전화를 했다.


늘 반가운 목소리로 대화는 시작되었고, 10년을 보낸 우리의 삶의 이야기들이 대화의 주축이 되어 나를 발견하고, 그의 삶을 느꼈다.


그: 그때 너랑 헤어지고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어. 그게 몇 년쯤 이어지니 습관이 되더라고, 습관이 되니 일하는 게 오히려 편해지더라. 원래 내가 그런 사람이었나 싶기도 하고, 혹시 콤플렉스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니?

나: 콤플렉스라..., 나는 지금인 것 같아.

그: 콤플렉스를 가진 자가 항상 세상을 지배해 왔대. 아돌프 히틀러,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키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히틀러는 성적 콤플렉스가 있었고..

나: 그러네, 콤플렉스에 어떤 힘이 있는 건가?

그: 사람에게 욕구를 부추기며 한 없이 존재를 작게 만들어 내재된 분노를 끓어 올리는 게 아닐까? 근데 나에게도 콤플렉스가 있더라.

나: 어떤 거였어?

그: 스페셜리스트, 남들보다 특이한 생각을 해야 한다라는 거, 주변의 기대에 부흥해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거?

나: 지금도 그런 게 있는 거야?

그: 응, 여전히 있지만 누구 덕분에 콤플렉스에서는 벗어난 것 같아. 일에 몰입하면서 다양한 상황에서 뭔가를 선택할 때가 있었거든, 그때 네가 뭔가를 선택했던 장면에서 봤던 자신감? 그때의 아우라를 생각하며 선택을 했었어

나: 응? 내가 선택했던 장면?

그: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어. 네 선택은 항상 당당했고, 옳았어.


자꾸만 내 선택이 옳았다는 이야기를 그는 돌려 돌려 이야기했다. 그와 통화를 시작한 지 한 달째 되던 날, 마음에 다시 단단한 뿌리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제법 연둣빛은 초록초록해졌고, 새벽의 시간이 짧아져 6시에 눈을 뜨면 환한 빛이 눈부셨다. 그 빛이 닿은 초록잎들이 반짝이는 것에 이제는 마음이 두근거렸다.


괜찮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오래전 그가 알고 있었던 나는 이미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계속 나를 그 사람이라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는 착각하게 된다. 그때의 내가 나인 것 같은 달콤한 생각에 빠진다. 거울 앞에 서본다. 10년이라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다.


그: 만나래?

나: 응?

그: 우리 만나자.

나: 응...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서본 나를 예감한 걸까? 만나자는 그의 이야기에 당황하여 긍정의 신호를 주었다. 지금 나는 그와의 통화만으로 충분했다. 그가 전해주는 말들, 톤과 억양에서 위로받는 하루로 내 상처는 조금씩 치유되고 있었다. 그와 만나는 것은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와 만난다면 분명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할 거라 확신했다.


나: 내가 아직은 준비가 안된 것 같아. 미안해

그: 응, 괜히 앞서갔네. 난 괜찮아.


그날의 대화는 서로 어색함을 티 내려하지 않는 것이 어색한 기운을 뿜어 댔다. 계절이야기, 최근 먹었던 음식 이야기, 케이크를 배우고 첫 케이크를 구웠던 이야기, 운동은 무엇을 했는지, 그땐 알지 못했던 서로의 MBTI 이야기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지만 어색함을 빼버린다면 그 대화도 꽤 괜찮았다. 시간도 어색했는지 천천히 흘러갔고, 천천히 시간이 흘러감을  들키지 않으려 우리의 통화 시간은 더 길어졌다.


나는 순간 이 상황이 재밌어 피식 웃고 말았다. 내 웃음이, 수화기 건너 들리는 그의 미소가 위로가 되었다. 곧장 우리의 대화는 '만남'이 주제가 되었다.


나: 이십 대 땐 만남을 갈구했었어.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 그 안에서 순간의 재미가 의미가 되었던 것 같아.

그: 난 이상하게 새로운 만남이 늘 편하지 않더라. 뭔가 애를 써야 하잖아. 그게 늘 불편했어.

나: 나는 마흔이 되니 그런 애씀이 불편하더라고, 의미를 찾기도 어렵고..., 어떨 땐 그게 시간 때문인 것도 같았어.

그: 시간?

나: 해야 할 일이 많아지니, 시간의 시간이 금방 지나가는 거.. 그런 거 있지? 시간이 짧게 느껴지니, 의미 있는 곳에 써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던 것 같아.

그: 지금도 그래?

나: 아니 전혀, 너무너무 천천히 가. 요즘은 이 시간만 기다리는 것 같고, 기다리니.. 시간은 더 안 가고, 요즘은 그래.

그: 그런데.. 나는 지금 네 시간이 아까운걸.


내 시간이 아깝다는 그의 이야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화를 끊고 곧장 붓과 종이, 물감을 꺼내었다. 초록이 빛에 닿는 느낌을 밀도 있게 담고 싶어졌다. 며칠 전 그것에 설레었던 마음을 담고 싶어졌다. 내 시간을 아깝지 않게 쓰고 싶어졌다. 계속해서 그의 말은 나를 움직이게 한다. 다 죽어가던 세포들을 깨우고, 생각을 하게 한다. 그것은 지금 나에게 최고의 위로였다. 그날, 새벽녘이 되어 초록빛의 두 번째 작품이 완성되었다.


평온함과 따뜻함, 프레데릭 레이턴의 "Flaming June", 그림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분명 '위로'이다. 작품 속 여인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자세는 매우 자연스럽고 시간은 나른한 오후쯤 되어 보인다. 머리맡으로 보이는 풍경 속 바다에 햇살이 낮에 비추어 빛나고 있으니 말이다. 마치 그에게 위로받는 나의 모습과도 같다고 느꼈다. 그날 이후 깊은 잠을 깊이 자지 못했다. 얕은 잠 속에서 악몽과 만날때면 눈 조차 떠지지 않아 깊이 괴로웠다. 초록빛의 두번째 그림이 완성될 때 쯤 작품 속 여인의 모습마냥 잠시 깊은 잠과 만날 수 있었다. 작품 속 여인 또한 햇살의 위로를 맞으며 잠든 것으로 느껴졌다. 섬세한 묘사력은 낮아진 햇살의 언어를 돋보이게 했다. 작품 속 바다는 햇살의 언어를 전달하는 것에 꼭 필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어쩌면 바다가 비춘 햇살이 여인에게 닿은 것인지도 모른다. 드레스 주름 하나, 살결, 머리카락 등 모든 것이 정교하게 평온함의 언어에 충실히 역할을 다한다. 레이턴이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위로라는 것을 그와의 통화를 통해 위로 받고 있는 나는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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