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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횬 Apr 10. 2024

사랑


큰 식탁을 앞에 두고 혼자 앉았다. 매일 그래 왔지만 이상하게 오늘은 그것이 인지되었다.


말짱한 정신으로 앉아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매일 주량을 체크했다. 시야가 한 템포, 두 템포 천천히 움직일 때쯤 멈추었다. 그 이상 알코올이 흡수되면 힘들다는 걸 알기에 스스로 멈췄다. 그때쯤이면 괜한 혼잣말을 하고, 실실 웃음이 났다. 딱 그때까지가 좋았다. 물론 그 기운이 사라지면 한잔 더 할까란 유혹이 왔다. 매일 그 일을 반복했으니, 큰 식탁은 중요하게 와닿지 않았다. 주량을 체크하기 위한 주종은 다양했기에 나에게 딱 맞는 스타일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루는 ‘사랑’을 이야기했다. 혼자 떠들어댔다. 내 시야가 천천히 느껴질 때쯤 웃으며 나는 질문하고 답을 했다.


나: 사랑은 뭘까요?

나: 끓어올랐다가 식는 거.

나: 모두에게 그런 건가요?

나: 식으며 달라지는 건 같고, 색은 모두 다를 것 같아요.

나: 어떻게요?

나: 식으며 더 탐스런 색인 사랑도 있고, 식으면 흙탕물 색인 사랑도 있고?

나: 당신은 어땠나요?

나: 마지막일 줄 알았던 사랑이 흙탕물색이었네요. 그것도 까만색이 끓어 새 까만색이 되었네요.


웃음이 났다. 혼자 이랬다 저랬다 하며 사랑을 정의한다. 이제 나에게는 없을 사랑을 정의해 본다.


어느 날은 그가 이야기한 콤플렉스에 대해 생각했다. 사랑이 나에게 콤플렉스가 되었다는 것을 차마 그에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와 함께 했던 5년도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그저 예뻤기에, 그것까지 콤플렉스일 수는 없는 일이다. 더 깊이 생각해 보니 사랑이 나에게 흙탕물색과 콤플렉스가 아니었다. 사랑은 그냥 예전 그 시절에 그대로 머물러 그냥 사랑이었다. 나에게 흙탕물색과 콤플렉스는 최근 나를 지나간 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희망이 생겼다. 이미 지나간 사람이고, 내 인생에서 다시 만나지 않아도 된다. 이제 나는 나에게 집중하면 된다.


끝도 없는 아래로 번지점프 하듯 떨어진 그날, 내가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에 집중하면 된다. 이 얼마나 심플 한가? 말짱한 정신으로 식탁 앞에 앉으니 지금의 내 상황도 그럭저럭 견딜만한 것이 되었다. 어쩌면 그동안에 직면하기를 외면하고 애써 꺼내려고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알게 된다. 상처는 그것을 직면할 때 치유 할 수 있는 답이 나온다는 것을…,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은 늘 있어 왔던 내 삶인데, 이제는 그것을 동경하게 되었다. 동경하게 되니, 측은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 나는 사랑 때문에 아픈 걸까? 사랑의 이면으로 아픈 걸까? 답이 후자임을 알게 되자 희망이 생겼다. 사랑,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그냥 잠시 멈추었다. 그렇다고 내가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그런 의존형의 사람은 아니다.

그저 궁금해졌다. 사랑의 끝은 늘 이런 걸까?


사랑에 대한 희망이 작게 생겼을 뿐 달라진 것은 없지만 외출 준비를 했다. 오랜만인 외출 준비가 익숙하지 않은 듯 낯선 움직임이 어색하고 느렸다. 계절이 바뀌어 옷장 깊숙한 곳에서 얇은 코트를 꺼내었고 어디두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한참 동안 차키를 찾았다.


목적지는 카페와 서점이었다.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찾은 것은 것이다. 카페의 분위기, 사람들의 편안함은 예전과 같았지만 메뉴가 바뀌었다. 좋아했던 빵 메뉴가 사라졌다. 사실 이곳을 찾은 이유가 바삭하고 달콤하고 속은 촉촉한 '퀸 아망'을 먹고 싶어서였다. 아쉬운 마음이었지만 비슷한 결의 빵과 커피를 주문하고 대형 테이블_넓고 긴_에 앉았다. 길고 넓은 테이블 자리는 주로 노트북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 책을 읽는 사람들, 혼자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자리를 띄워 앉는 곳이고 카페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중앙에서 바라보면 카페의 모든 풍경이 눈에 담긴다. 내 앞과 옆의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유심히 보았다. 무엇을 하길래 저렇게 집중하는 걸까?


나에게는 저런 순간이 있었을까? 커리어를 놓고 살림을 하며 문서와 노트북은 나와 거리가 멀어졌다. 간간히 책을 읽으며 지식을 쌓고 타인의 삶을 음미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집중보다는 여유였다. 자주 이곳에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커피잔에 담긴 마지막 커피를 한 모금 아쉽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와 거리가 꽤 있는 서점으로 갔다. 운전을 하고 싶었다. 차창밖 풍경이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듯했다. 봄은 근사한 계절이다. 생명이 자리를 잡고 푸르러지기 전,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낸다. 그 에너지를 운전을 하며 온전히 내 안에 담았다.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코너부터 찾았다. 몇 달 전 읽었던 책이 베스트셀러 자리에 그대로 있는 걸 보니 반가웠다. 백일 넘는 시간이 나에게는 지겹도록 오래된 시간처럼 느껴졌는데 세상은 그대로인듯해 반가웠다. 나는 서점의 중앙 혹은 입구 쪽을 자랑하는 베스트셀러 코너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벽장 쪽에 한 권씩 꽂혀 있는 책들에서 보석을 발견할 때가 많았다. 매일 서점을 찾았던 때는 소설이나 에세이 코너의 벽장책을 모조리 꿰고 있을 정도였다. 상처를 직면하여 치유할 수 있는 이야기, 나에게 집중하는 이야기가 담긴 책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게 답은 아닐지라도 오늘 저녁, 내 생각이 맞았다며 응원해 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으로 발견한 책을 한 권 구입해 집으로 왔다. 책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다.


[사랑에 대한 단상]
나의 사랑에선
늘 송진 향기가 난다.
끈적거리지만
싫지 않은
아주 특별한 맛
나는 평생
이 향기를 마시기로 한다.
아니 열심히 씹어보기로 한다.
흔들리긴 해도
쓰러지진 않는
나무와 같이
태풍을 잘 이겨낸
한 그루 나무와 같이
오늘까지
나를 버티게 해 준
슬프도록 깊은 사랑이여
고맙고 고마워라
아직도 내 안에서
휘파람을 부며
크고 있는 사랑이여
.... [이해인]


책은 나의 생각과 다른 부류였다. 역시 난 여전히 사랑을 갈구하는 건가? 사랑이 실패하여 이렇게 아픈 걸까?  나에게 사랑은 뭘까? 태풍을 잘 이겨내고 새로운 사랑을 하고 싶은 걸까?


그날 밤 내 앞에 놓인 하얀 수채화지에는 분홍빛의 물감이 유영하듯 스며들었다.


인상주의 화가 마네의 <라튀유 씨의 레스토랑에서> 작품을 보면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떼지 못한다. 화면에 바로 보이는 남자의 시선은 여자의 눈을 응시하며 상대의 눈에 자신을 담고 있다. 사랑의 시작인 것이다. 사랑에 빠진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장면, 여자의 등도 의자에서 떼어져 남자를 향해 있으니, 그들은 분명 사랑을 시작한 것이다. 작품을 보고 있으면 설레고 기분좋은 예감이 든다.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향해 모든 감각을 쏟아 붓는 일이다. 그 중에서도 눈은 가장 많은 일을 한다. 눈을 통해 보고, 눈을 통해 읽는다. 삶을 살아가는 중 가장 따뜻하고 평온하고 그윽해진다. 나에게도 그런 날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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