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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횬 Apr 06. 2024

몰입



몰입
깊이 파고들거나 빠짐.

하필 수북이 벚꽃이 떨어지고 있었다.

왜 그 순간에 바람이 불어 눈이 내리 듯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벚꽃이 떨어진 걸까?

또 왜 그 장면이 빠르게 지나가던 내 시선에 담긴 걸까?


나: “잠시 만날 수 있을까?”

그: …….


백일 만에 사람과의 대화였다. 그리고 상대는 10년 전 내 첫사랑이었다. 상대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럴 만도 했다. 오 년을 만난 그 아이와의 마지막 장면은 방금 전 시선이 머문 벚꽃의 떨어짐이었다. 벚꽃비 아래에서 우리는 만났고 벚꽃비 아래에서 만남을 멈췄다. 우리는 각각의 사람이니 만남의 느낌과 이별의 느낌이 똑같을 수 없다. 명확한 것은 나에게는 풋풋한 첫사랑, 한 번쯤 잡아 보고 싶은 예쁜 시간들이었다. 침묵인 그에게 우리의 만남이 어떤 향으로 남아있을지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전화를 끊고 싶어졌다.


그: ”연화? 서연화?, 진짜 연화니? 깜짝 놀랐어"

그 말이 십 년만의 인사를 대신했다.


나: ”응, 잘 지냈어?"

그: “난 잘 지내고 있어, 벌써 10년이 지났네. 그런데 연화야, 혹시 무슨 일 있어?, 반가운데.. 걱정이 되네"


나: ”너.. 혹시 결혼했어?"


어처구니없게 계속해서 직진인 질문들이다.

왜 쓸데없이 그의 걱정에 결혼을 물었던 걸까?

주말 오전의 전화에 혹여나 그의 결혼이 위태해질까 걱정이 되기도 했고, 사실 늘 궁금했었다. 나와 결혼해 알콩달콩 잘 살고 싶다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결혼을 했을까?


그: “아니, 일하느라 정말 바쁘게 지냈어.  결혼이란 걸 생각하지도 못했네"


즉흥적으로 전화번호를 눌러버린 이상한 나의 행동이 그의 생활에 피해가 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내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그: “네 소식은 알고 있었어, 그때 좀 많이 힘들었었거든"


그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가 알고 있다는 내 소식은 결혼 소식일 테고, 그와 헤어진 지 일 년쯤 뒤였으니.. , 그가 알게 된다면 힘들어할 거라 짐작은 했었다.


나: “그래, 계절이 이때쯤이었지, 근데 나 석 달 전에 이혼했어. 이혼했다고 연락한 건 아니고, 일어나서 창 밖을 보니까 벚꽃이 그날처럼 떨어지잖아. 그래서 그냥 생각이 났어. 그러면 안 되는데.. 전화번호부에 네 이름이 있어서 누른 거야. 정말 아무 뜻 없이.. 사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었거든, 3개월쯤 혼자 지낸 것 같아. 그건 그냥 그러고 싶었거든."


말을 하면서 머릿속으로는 빨리 전화를 끊고 싶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왜 전화를 했는지,  전화번호는 왜 저장이 되어 있었던 건지, 뭐든 마음먹으면 바로 해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은 오늘 큰 실수를 해 버렸다. 사실 깨끗하게 결혼 생활을 정리한 건 한 달 전이었다. 그 일이 있은 것이 석 달 전, 그리고 그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 “그래, 그날 벚꽃이 엄청 떨어졌었어. 나도 한 번씩 이맘때면 생각났거든"

나: “일은 잘되고 있어?, 계속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거야?"

그: “응, 10년간 일에만 빠져 있었어. 누가 보면 진짜 미친 사람처럼.. 그렇게 했던 시간들이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었나 봐, 요즘도 그냥 일만 하고 있어. 힘들 법도 한데 내 나이가 치열한 삶에 힘을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 요즘은 일이 즐거워 “


그의 일 이야기를 한참 듣고 나서 우리는 다음 통화를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백일만에 누군가와 대화를 했다. 벚꽃이 마법을 부린 걸까? 평소였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했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선 숨어버리고 싶은 일이었지만 통화를 하며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리고 사람과의 대화 자체가 반가웠다. 10분 남짓한 대화였지만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갈증이 느껴졌다. 누군가의 생각이 입을 통해 언어로 나와 내 귀에 닿고 그것이 내 머릿속으로 다시 흘러 들어가 새로운 나의 생각으로 정의된다는 것이 꽤 즐거운 일임을 알게 되었다.


일이 즐거운 나이, 우리 나이가 애쓰는 삶에 힘을 준다는 그의 이야기에 나에게 질문한다.


일에 한번 빠져볼까?


일이 즐겁다는 첫사랑의 이야기가 부러웠다. 그는 청춘의 끝에 서 있는 결혼이라는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선택한 그가 몰입한 일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선택이었다. 청춘의 시작지점에서의 선택, 청춘의 끝지점에서의 선택, 그리고 몇 달 전 나의 선택, 오늘의 선택, 그리고 앞으로의 선택…,


스며들며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춘 물감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 붓에 물을 적셔 또 따른 물감의 길을 만들어 본다. 화려한 배색으로 물의 길을 찾아주고 온도와 습도를 체크하며 마르는 시간을 예측해 본다. 그 예측에 맞추어 물감을 얹어주면 자유 영혼인 물감의 마음이 읽힌다.


수십 장의 습작들에는 답이 없는 질문들이 어려있다.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니 완벽하진 않지만 답이 조금은 선명해졌다.

그 답에 몰입해 보기로 했다. 그것이 오늘의 선택이었다. 며칠 전 배송된 가장 작은 사이즈의 아르쉬지를 꺼내었다.


이번에는 완성해 보자

물의 갈길을 예측해 보기로 했다. 온 습도계를 체크하고, 맑은 물의 길을 내주었다. 내가 찾은 답이 옳은 답인지 알고 싶어졌다. 벚꽃 색을 붓에 머금었다.

하루하고 반나절, 눈을 감지 않고, 다섯 잔의 커피와 함께 그렇게 나의 첫 작품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내 선택은 정답이었다.


10년 만에 그와의 통화는 내 안의 생명력을 다시금 이끌어 냈다. 마치 반 고흐의 <아몬드 나무>처럼, 나의 첫 작품은 몰입에 영광하며 세상에 등장했다. 꽃 피는 나무가 고흐에게 영감을 주었다면, 일에 애쓴다는 그의 이야기는 내 삶에 영감을 주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그려진 아몬드 나무 역시 고흐에게는 희망이지 않았을까? <아몬드 나무>는 반 고흐의 동생 테오에게 아들이 생기며 테오는 형에게 편지를 썼다.

“우리는 아기가 언제나 형처럼 굳센 의지와 용기를 가지고 살아갔으면 좋겠어.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형의 이름을 짓기로 했어.”      

고흐는 매우 기뻐했다. 생 래미의 정신병원에서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고 있던 고흐에게 어떤 삶의 희망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는 조카의 침실에 걸 그림으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흰색 아몬드 꽃이 만발한 커다란 나뭇가지 그림을 그린 것이다. 푸른빛 하늘 아래 빛나는 아몬드 꽃잎들에서는 환희가 넘친다. 고흐는 그림을 그린 후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결심을 하게 되지만 아몬드 나무와 푸른 하늘은 반 고흐의 인생에서 마지막 봄이었다.      


조카에 대한 사랑과 축복을 담은 희망의 이야기들과 축복의 메시지가 가득 담겨 있는 그림, 조카를 사랑했던 고흐의 마음은 그림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평범한 삶을 꿈꾸었던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음을.      

고흐가 <아몬드 나무>를 그리며 새로운 삶을 꿈꾸었듯, 하루하고 반나절 그려 완성된 나의 첫 작품으로 나는 새로운 삶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내 삶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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