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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횬 May 25. 2024

희망

희망
앞으로 잘될 수 있는 가능성.


"좋아해" 그 말 이후 연우의 직진은 시작되었다. 마치 사춘기 소년의 수줍은 열병 같은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마흔 살 연우의 사랑이 내가 숨 쉬는 공간의 공기를 바꾸었다. 공기가 달콤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정신이 나간 듯 두근거리는 내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불안했고, 갑작스럽게 우울감이 찾아왔고, 나를 자책하며 상대를 미워했다. 그런 마음이 내면에 가득 자리 잡고 있었다. 부정의 감정들을 내 안에 담은 채 연우와 시작할 수는 없었다.


나: 연우야, 잠깐만 이야기 좀 해

그: 응, 이야기해

나: 있잖아, 시간을 좀 줄 수 있을까? 너무 오래 걸렸지만, 조금만 더. 아직 내가 좀 아파. 마음이, 이런 마음으로는 아직은 힘들 것 같아. 편안해지고 널 만나고 싶어. 미안해

그: 연화야, 미안할 일이 아니야. 충분히 이해해. 기다릴게.

나: 있지, 그림이 치유가 되더라. 그림에 집중을 하고 싶어. 다 잊을 수는 없겠지만, 옅어지는 것 같아. 이제 시작이지만 몰입할 땐 자유로와. 작품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어. 누군가에게도 치유가 되는 그런 그림.

그: 치유의 그림이라니, 느낌이 너무 좋은데? 내가 방해가 되는 건 아니겠지?

나: 방해라니.. 무슨 소리야, 네 덕분에 시작할 수 있었어. 그림말이야.

그: 한 번씩 커피사서 구경가도 되지?

나: 응, 환영해


그날 이후, 우리의 관계는 언제나 늘 있어오던 일상처럼 편안하게 서로를 채웠다. 그는 그림을 자주 보러 왔고 늘 감탄을 했다.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어느 날은 리액션이 너무 과해 그를 진정시키며 물었다.


나: 연우야, 진정하고.. 너 진심인 거 맞지? 아니면 그림에도 콩깍지가 씐 건 아닐까?

그: 쉿, 감상중이야. 치유받고 있어.

나: 하하, 그래그래

그: 연화야, 몇 작품쯤 될까?

나: 30작? 세어보진 못했는데.. 그 정도 될 것 같아.

그: 우리 전시회 하자.

나: 전시회? 에이, 무슨 전시회야.

그: 네가 그랬잖아. 누군가에게 치유가 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이렇게 두면 아무도 볼 수 없잖아. 우리 딱 열작품만 더 완성되면 하자. 전시회.


전시회라니..., 그의 제안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손을 내저었지만, 그가 돌아간 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치유가 될 수 있는 그림, 그림은 나를 치유하고 회복시켰다. 나아지고 있는 내 감정들이 온전히 담겨 있는 그림들이 정말 누군가에게 치유가 될 수 있을까? 우선 그 질문부터 던졌다. 타인의 시선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없으니, 답은 알 수 없었다.


언니들과 현이에게 전화를 했다.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답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집으로 와달라는 요청을 하고는 그림들을 겹쳐지지 않게 바닥에 세웠다. 서른 작품이 넘으니 거실과 주방까지 그림으로 꽉 채워졌다. 바닥에 둔 것이지만 흡사 전시장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작품의 색은 블루와 퍼플, 그리고 짙고 쨍한 그린 컬러가 주요 컬러로 흰색 바탕의 적절한 여백이 색을 돋보이게 했다. 작품은 수채화 물감으로 작업했지만 겹겹이 물감이 쌓이고 쌓여 매우 단단한 수채화의 느낌이다. 겹침은 오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겹침아래 투명하게 보이는 색들이 마음을 지켜주고 있는 것 같다. 물감이 완전히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물감을 올리고, 완전히 또 말리는 과정에는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하다. 기다리는 시간이 나에게는 나와 만나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나를 재생시킨다. 내 삶에 던져진 새까만 재들을 거둬간다. 바닥에 세워둔 그림들을 찬찬히 보며 여러 감정들에 마음이 아파오다 진정되기를 반복하는 중 현이가 도착해 벨을 눌렀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 집으로 와달라는 요청에 근심 가득한 얼굴이 보인다. 문을 열고 다급히 들어오며 현이는 내 두 손을 덥석 잡으며 얼굴부터 살폈다.


나: 아무 일 없어.

현이: 빛의 속도로 왔잖아.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휴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사방을 에워싼 그림으로 향했다.


현이: 이게 다 뭐야? 와... 연화 네가 그린 거야?

나: 응, 보여주고 싶어서 불렀어.

현이: 와...


현이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와"를 연발하며 거실과 주방의 그림을 천천히 살폈다. 그리고 처음으로 완성한 작품 앞에 섰다. 처음으로 완성을 위해 애쓴 작품이었다.


현이: 이상하게 이 작품은 슬퍼, 왜 그렇지?

나: 첫 작품이야.

현이: 있지, 작품들에서 변해가는 네 마음이 느껴져. 그리고 뭔가 따뜻해져.


누군가에게 주고 싶었던 언어였다. 마음과 따뜻함, 치유와 회복, 그림을 그리며 받은 힘을 누군가에게도 전하고 싶었다. 현이가 그림에 몰입하는 중 언니들이 도착했다. 우당탕탕 언니들의 등장도 요란스러웠다.


선화언니: 연화야, 뭐야? 무슨 일이야?

경화언니: 이건 다 뭐야? 와...

나: 언니들 미안해, 아무 설명 없이 와달라고 했어 놀랬지? 아무 일 없어.

현이: 오랜만이에요. 언니들.

경화언니: 현이도 왔네, 진짜 오랜만이야. 왜 이렇게 이뻐진 거야. 밖에서 보면 몰라보겠어.

선화언니: 진짜 너무 놀래서 정신이 하나 없었어. 그림 이건 다 뭐야?

현이: 연화의 작품들이요. 전시회장 같아요. 그렇죠?


언니들은 동그래진 두 눈으로 작품을 찬찬히 감상했다.

경화언니: 아니, 연화에게 이런 재능이 있었어?

선화언니: 연화야, 작품 전시하자. 당장.


언니들의 반응이 나에게는 답이었다. 둘은 어떤 상황에서 평가를 해야 할 때는 매우 이성적이고, 정확하며, 괜한 말이란 없는 칼 같은 사람이기에 언니들의 반응에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나: 해도 될까? 그것에 대한 답이 필요해서 세 사람을 부른 거야.


우리는 그림이 펼쳐진 주방의 식탁에 앉아 경화언니가 만든 음식에 맥주를 곁들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그림과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림을 그리며 어떤 치유가 있었는지, 그것이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 그리고 연우에 대한 이야기와 연우가 꺼낸 전시회 이야기를 전하며, 셋이 궁금해하는 우리의 관계를 정리해 주었다.


나: 우리는 내가 좀 더 단단해지면 다시 시작할 거야.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완전한 치유까진 아니더라도 내가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평생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아.’)


셋은 내가 이기적이라며 나무라다가, 그림에 집중하고 싶은 내 마음을 이해했다가, 연우가 불쌍하다고 했다가, 내가 불쌍하다고 했다가, 결론은 없이 기복이 큰 이야기의 결들에 웃고 웃었다. 그리고 그들은 결론을 내려주었고, 열작품이 완성된 후 나는 전시를 하기로 했다. 모든 준비는 셋이 할 테니,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란 그들의 이야기가 들려오고 오랜만에 마신 알코올의 기운이 노곤하게 만들었다.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새벽녘, 잠에서 깼다. 거실소파에는 현이가 바닥에는 두 언니가 잠들어 있다. 해가 창으로 비추기 시작하자 바닥에 세워져 있는 작품들에서 빛이 났다. 그 빛에서 나는 희망을 보았다.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곧장 작업테이블로 가서 붓을 들어 팔레트의 컬러를 선택하여 물감이 종이에 스며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앞으로 열작품, 마음을 담아 작품을 빠르게 완성하기로 마음먹었다.


조지 프레드릭 왓츠의 그림의 제목은 반전이다. 어떤 희망도 보여지지 않는 절망에 빠진 여인이 보인다. 두어줄 남은 듯 보이는 악기를 끌어안고 있는 여인에게는 어떤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깊은 절망이 느껴지는 이 그림의 제목이 희망이라니 매우 역설적으로 느껴지지만 자세하게 그림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여인의 눈은 감겨 있지만, 마치 희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듯하다. 자세와 얼굴의 표정에서는 평안함이 느껴지니 말이다. 어두운 배경 속에서도 여인의 모습은 빛이 닿아 밝게 묘사되며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자유롭지 못한 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악기의 줄이 하나씩 끊어져 나갈때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희망'은 무엇일까?


삶의 희망과 절망은 누구에나 공평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희망을 놓고 놓지 않는 것, 그것은 선택일 것이다. 어쩌면 가장 절망적인 순간, 희망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놓지 않고 있는 희망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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