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 후 열심히 선을 보러 다니던 때, 친정엄마는 그 날도 한복을 곱게 입고 나를 시장의 매물로 내놓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한 걸음이 천 걸음 같은 기분으로 약속장소로 나갔다.
어머니의 마음은 이해했다. 딸이 좋은 인연을 바라는 간절함, 그리고 적당한 나이에 좋은 사람 만나 안정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 그 때 당시에는 4년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이 아니라 결혼을 선택하던 때였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마치 상품처럼 포장되어 누군가의 품평을 받으러 가는 기분이었으니까.
"얌전히 잘해라. 남자가 국민연금공단에 다니고, 집안도 괜찮다고 하더라. 대학도 연세대를 나왔데" 엄마는 당신의 한복 고름을 다시 한 번 매만지며 말했다. 거울 속 내 모습은 말끔했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사실 이번 남자는 엄마의 오랜 친구가 소개한 사람이다 엄마는 그래서 더 믿고 있는 것 겉다
약속장소는 그 사람이 근무하는 공단 건물의 13층에 있는 커피숖이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석양의 하늘은 충분히 나의 감성을 자극하고도 남았다. 우리가 먼저 도착해서 자리에 앉았다.남자측은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가 나오셨다 남자가 아직 등장하지 않아 어른들끼리의 상투적인 대화가 오고 갔다.
"요즘 직장이 많이 바쁘다고 하더라구요 집에도 거의 12시 넘어서 들어옵니다" 상대방 아버지의 변명이다 변명인 줄 알면서도 상대방도 나처럼 끌려 나오나 보다 하는 생각에 속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이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늦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었다. 급한 일이 생겼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나처럼 이런 만남이 부담스러워서일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오히려 상대방이 궁금해졌다.
약속 시간보다 15분 정도 지나서야 남자가 나타났다. 들어오는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키가 크고 단정한 모습이었지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친숙함이 느켜졌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그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일단 목소리는 합격이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마음에 든다
평소 콧대가 높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던 나였다. 시간 약속을 어기는 것을 특히 싫어했고, 늦는 사람에 대해서는 기본 매너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달랐다. 그 사람이 늦게 온 것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늦음 속에서 진실함을 느꼈다. 억지로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온 것이 더 진솔해 보였다. 만약 그가 시간에 맞춰 완벽하게 준비해서 왔다면, 마치 연극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을 텐데.
"회사 일로 좀 늦었습니다." 그가 간단히 설명했다. 변명조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톤이었다. 그의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다.
국민연금공단에 다닌다고 했다. 나보다 5살 많았다. 대화를 나누면서 아주 오래된 만남에서나 느켜지는 알 수 없는 친숙함이 철옹성을 조금씩 뚫기 시작했다
"평소 어떤 일을 좋아하세요?" 그가 물었다. 정해진 질문 같았지만, 그의 눈빛은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내가 독서를 좋아한다고 하자, 그도 책을 즐겨 읽는다고 했다. 최근에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이미 어른들은 우리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넓다란 커피숖에 우리 둘만이다.
사실 난 그 때 같은 과 선배와 사귀고 있었다 선배는 나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고 난 결혼은 글쎄라는 마음이었다 그런 와 중에 만난 그 사람은 신선했다 키워드가 전혀 다른 사람. 무엇이 신선하게 느끼게 했는지 35년이 지난 지금도 알 수 없다 신의 장난이었을까
"다음에 시간이 되시면 좀 더 편한 곳에서 만나뵙고 싶습니다." 헤어질 때 그가 말했다. 정중하면서도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택시를 잡아주며 그가 덧붙인 말 " 차 번호 제가 메모했으니까 걱정 말고 가요"
설레였다 아니 흔들렸다 택시 번호를 메모한다는 말이 뭐라고 난 그 말 한마디에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한 것은 아니다
집으로 돌아온 나를 붙잡고 엄마가 묻는다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내가 대답했다. 어머니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설레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완벽하지 않아서 더 완벽했던 그 사람, 늦게 와서 오히려 진실함을 보여준 그 사람이 자꾸 생각났다.
콧대 높은 내가 그의 늦음을 용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늦음 속에서 진짜 그를 발견한 것 같았다. 때로는 완벽하지 않은 것이 더 완벽할 수 있다는 것을, 그날 나는 배웠다.
그렇게 나의 첫 사랑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