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가 주는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를 다른 동네에서 다닌 나는 그쪽 방향 버스를 탈 때마다 고등학교 때가 떠오른다.
흰 블라우스, 남색 조끼와 마이 그리고 치마. 남색의 촌스러운 리본. 그 교복을 입고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자마자 학교로 뛰는 나.
오늘은 유난히 더 그랬다. 왜 인지는 모르겠다. 늦잠을 자서 일어나자마자 급하게 씻고 병원 예약 시간에 맞춰가는 게 항상 서두르던 고등학교 때의 아침을 생각나게 해서 그런가?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약간 쌀쌀한 듯한 날씨, 내가 좋아했던 춘추복을 입던 계절이어서 그런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때에 익숙한 향기가 났다.
'어? 이거 고등학교 때 교실에서 자주 나던 냄새인데.'
교복을 입은 학생이 옆을 지나갔다. 뭐지? 학생들에게 유명한 향수인가? 아님 이 동네에서만 파는 섬유유연제가 있나? 말도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교복을 입은 학생이 아닌 스커트를 입은 직장인. 신발주머니로 보였던 가방은 도시락 가방. 뭐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 소수로 남아서 하던 야간 자율 학습이 재미있었을 때도 있었고, 애들이 야자를 빠져서 남은 석식을 소수가 독차지해서 맛있는 반찬을 잔뜩 퍼담고 행복했던 그때만의 소확행이 있었지. 점심 먹고 학교 한 바퀴를 빙 도는 산책 시간. 관심 있던 남학생을 보는 보충 수업을 기다리는 재미. 그 애도 날 좋아했단 걸 알게 된 어느 봄. 목표한 공부량을 채우고 몸은 피곤하지만 뿌듯한 맘으로 하굣길 버스에 오르던 고3 때의 나.
하지만 고등학교 때의 기억이 마냥 좋은 것도 아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어울리지 못했던 1학년의 기억이 거의 통째로 날아갔고, 상황은 나아졌지만 비슷했던 2학년. 3학년 때는 말수가 없던 내게, 심지어 담임선생님이라는 사람이 한 말은, '쟨 알고 보면 귀신인 거 아니냐, 1년이 지나고 보니 원래는 없던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더 상처였던 것은 그 말에 같이 웃었던 반 아이들.
'이때부터였나?' 최근에 한 어떤 성격 검사에서 [사람에 대한 믿음] 항목의 수치가 매우 낮음으로 나온 게 생각났다.
그런데 왜 고등학교 때를 생각하면 풋풋하고, 가끔 그리워지기도 하는 거야? 스스로에게 물었다. 잘 모르겠지만 뇌의 기능 중에 '유리한 쪽으로 기억해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특성' 같은 게 있는 거 아닐까? 마침표가 아니라 물음표로 끝나는 대답.
고등학생 때, 하면.
안 좋았던 기억은 쏙 지우고 3학년 새 학기 같은 반이 된 보충수업의 그 애가, 내게 식판을 잔뜩 건네주며 얼굴이 빨개지던 그 장면만 반복 재생되는 것은 왜 일까?
내 무의식의 잃어버린 인간애를 되찾으려는 노력일까, 아님 모든 기억들을 미화해버리려는 뇌의 수작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