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생, 왜 살아야 하나요?

새벽 5시에 일어나도 인생이 바뀌지 않는 이유

by 유영

"지나치게 바쁜 삶은, 결국 가장 중요한 질문을 놓치게 만든다."




갓생.

갓(God)과 삶(Life)의 결합. 말 그대로라면 신처럼 살아내는 삶이다.

한 마디로, 살아 있는 동안 '완벽히' 성공해야만 하는 시대. 이 단어는 일종의 종교처럼 번져갔다.

모두가 스스로를 단련한다. 새벽 5시에 눈을 뜨고, 스트레칭과 명상, 독서와 작심 루틴을 마친다.

자기 관리라 부르는 이 일련의 행동들로 인해, 삶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들의 변화는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방식이 모두에게 정답일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리듬과 방식이 있는 법이다.

새벽에 깨어 있는 것이 기적을 만들 수도 있지만, 밤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 또한 기적일 수 있다.


사실 이 모든 문화의 시작에는 '자기 계발'이 있다.

삶이란 건, 끊임없이 계발해야 하는 것이라고. 최대한 많이 읽고, 적고, 뛰고, 쌓아야 한다고. 그래야 인생이 바뀐다고 말이다.

"잠을 잘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이대로 하면 당신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갓생, 미라클모닝, 루틴, 시간관리. 이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에겐 그 루틴이 진짜 삶의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정답처럼 주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반복되는 습관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지속적인 개선이라는 이름 아래, 존재를 갈아 넣는 사회.

계발이라는 허울 아래, 인간의 감정을 삭제하는 신념.

우리는 언제부터 스스로를 끊임없이 계발하지 않으면 '게으르다'라고 느끼게 되었을까.

도대체 언제부터 무언가를 하지 않는 순간, 나 자신이 무너지는 듯한 불안을 느끼게 되었을까.

왜 살아 있는 동안 나 자신을 그렇게 '증명'해야만 하는 걸까.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이 문화가 자기계발의 외피를 입은 자기부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더 나은 내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은, 나를 부정하고, 나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이 사회는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사람'처럼 행동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더 나은 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부정하라는 말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모든 흐름은, 사실 거대한 자본이라는 논리에 의해 정교하게 설계된 것이라는 거다.

인간을 개조하고, 생각조차 사회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들어 스스로 질문할 시간을 앗아가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예쁘게 포장된 결핍에 목을 매게 만든다.

그렇게 결국 다시 자기계발이라는 이름 아래 달려갈 수밖에 없도록.

또한 이 구조는 모두가 같은 조건에서 출발했다는 착각을 만든다. 운, 구조, 차이. 이 모든 현실을 지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니까.


그런데,

당신은 정말, 그 새벽을 기다렸던가.

당신이 말하는 성장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 루틴을 반복하며, 당신은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잠들지 않는 시대는 불안한 시대다.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시대.

우리는 언제 쉬어야 할지도 모른 채, 그저 살아남기 위해 하루를 버틴다.

정해진 루틴, 조여 오는 규칙들, 그리고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자신을 다그치는 목소리.

결국 하루의 끝에서 침대에 누워 '아직도 부족하다'는 말을 중얼거린다.

그런데, 그게 정말 '갓'인가? 아니, '생'이기나 한가?


나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곧 더 잘해야 한다는 말로 뒤바뀌었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더 나은 자신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상태에 중독되어 버리고 말았다.

완성되지 않은 나는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착각.

새벽의 평온함은 고요가 아닌 강박.

계획은 자유가 아닌 굴레.

자기만의 루틴을 만들라고 말하지만, 정작 진짜 나만의 루틴은 허용되지 않는 삶.

느지막이 일어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하루를 보내는 삶을 갓생이라고 말한다면, 과연 누가 인정이나 해줄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루틴을 베껴 자신의 정답이라고 생각하며 따라 한다.

그러니 삶을 살다 공허가 밀려오는 것은 자신이 못나서가 아닌,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다.








삶은 계발의 대상이 아니다.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삶. 우리는 그 가장 단순한 진실을 가장 마지막에 배운다.

지속적인 변화와 향상을 추구하는 것은 나쁠 것이 없지만, 그 변화가 타인의 기준을 따라가게 될 때, 우리는 점점 '나'를 잃어가게 된다.

자기계발은, 자기를 알아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자주 '자기' 없이 '계발'만을 추구한다.


모든 사람이 같은 시간표를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일찍 일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깨어 있는 시간에 삶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고 살아가느냐이다. 당신은 정말 그렇게 살고 싶은가? 아니면,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믿게 된 것인가.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무엇을 떠올리게 되는지 생각해 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살아야 할 이유와 살아내야 할 의무 중, 만약 후자라면 우리는 이미 삶이 아니라 시스템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과 살아내는 것.

그 차이는 인간성으로 나뉜다.

진부한 말일지 모르지만, 조금 느려도, 조금 부족해 보여도, 조금 덜 해내도, 충분히 살아 있을 수 있다.

때로는 울기 위해 하루를 보내야 하고, 그냥 멍하니 앉아 있기 위해 하루를 써야 할 때도 있다.

성취하지 않아도, 쌓지 않아도,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삶.

하지만 우리는 늘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지 못했다.

쉬고 싶다고 말하면 게으르다는 소리를 들었고, 불안하다고 말하면 생각이 너무 많다는 말을 들었다.

무기력하다고 털어놓으면, 돌아오는 건 대부분 노력 부족이라는 말뿐이었다.

이미 세상이 쉼보다 실행을 칭찬하고, 슬픔보다 긍정을 더 가치 있게 여기니 그들 딴에는 정말 진심으로 한 조언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살다 보니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쉼이 없는 실행은 무너짐으로 이어지고, 슬픔을 지나지 않은 긍정은 공허함으로 남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일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삶을 계발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때때로 계발되지 않은 삶이, 더 넓고 깊은 시야를 갖게 해준다. 조금 덜 계발되었기에 더 많은 풍경을 볼 수 있었고, 조금 늦게 움직였기에 더 많은 질문을 가질 수 있었다. 삶은 빠른 루틴 속에서가 아니라 천천히 걸을 때, 더 많은 걸 알려준다.


그러니 오늘 하루, 꼭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된다. 갓생이라는 말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아도 된다.

그저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하루였다.

모두가 앞만 보고 달리는 길 위에서 잠시 멈춰 서는 것. 어쩌면 그건 우리가 다시 살아 있는 존재로 돌아가기 위한 시작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가장 진실한 사실은, 우리 모두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않았을 때에도 이미 살아 있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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