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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에서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by 진샤

광석아, 소주가 달다.


네, 형. 비가 섞이면 소주가 달아지나 봐요.


노래 좀 불러 봐.


뭐가 좋을까요.


어제보다 커진 내 방, 그거.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 텅 빈 방문을 닫은 채로

아직도 남아있는 너의 향기

내 텅 빈 방안에 가득한데

이렇게 홀로 누워 천정을 보니

눈앞에 글썽이는 너의 모습

잊으려 돌아누운 내 눈가에 말없이 흐르는 이슬방울들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묻히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긴긴밤을 또 잊지 못해 새울까.

창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보다 커진 내방 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너를 사랑해

새벽 어스름은 방을 좀 넓어지게 하는 뭔가가 있더라. 그래서, 빈 집이 더 커지기만 하더라.

형의 빈 집에는 그래도 사랑이 갇히지 않았었나요.


그랬지. 그래서 황망하고 사랑을 잃어 장님처럼 더듬거리던 내가, 결국은 사랑을 두고 문을 잠갔지.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 내 것이 아닌 열망들, 모두를 두고.

저는 시는 잘 몰라요. 그런데 빈 집은, 읽을수록 노래를 하고 싶어지게 해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요즘 사람들이 싫어할, 우울한 노래가 되겠지. (웃으며 소주잔을 채운다)


그럴지도 모르죠.

그런데 신기하죠. 요즘 사람들이 여전히 형의 시를 읽고 제 노래를 듣고 부른다는 거요.

시대마다 청춘은 어쩔 수 없는 거라 그래. 청춘을 반드시 한 번은 기적적으로 겪고 우린 그 시절을 쓰고 노래했으니까. 청춘 별 수 없는 거야.


그 시절에 사랑을 하고 아프고 고민하고 그러다 보니 우리가 떠오르는 건가요.


그 길목에 우리가 서 있는 거다.

우리가 청춘의 한가운데서 멈춰서 더 그럴 거야.

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 새와 작별하듯

그대 떠나보내고 돌아와 술잔 앞에 앉으면 눈물 나누나

그대 보내고 아주 지는 별빛 바라볼 때

눈에 흘러내리는 못다 한 말들

그 아픈 사랑 지울 수 있을까

어느 하루 비라도 추억처럼 흩날리는 거리에서

쓸쓸한 사람 되어 고개 숙이면 그대 목소리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어느 하루 바람이 젖은 어깨 스치며 지나가고

내 지친 시간들이 창에 어리면 그대 미워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

그립던 말들도 묻어버리기

못다 한 사랑


네 목소리는 소주와 어울리는구나.


형 시도 마찬가지예요.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소주를 들이켠다)


알 것 같아요,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노래했어요.


아니야, 너의 노래에는 사랑이 있어. 사랑이 없는 눈으로는 그렇게 노래할 수 없어.

요즘 사람들이 네 ‘서른 즈음에’를 최고의 노래말이라고 꼽았다고 하지. 나도 좋아해. 물론 내 생의 끝을 지나고 나온 노래이긴 하지만.



괜찮아요, 형. 지금 들으면 돼요.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서른 즈음에, 삶이 끝났다. 소주병이 내 옆에 있었지. 가끔 마흔 즈음, 그 이후의 삶이 어떨까 궁금할 때가 있어. 세상 사람들 사는 말 들어보면, 이 노랫말이 마흔 즈음에, 쉰 즈음에 들어도 그대로 와닿는다고 하더라. 정말 그런 건가 알 수가 없다.

저도 몰라요. 형. 그냥 서른 즈음에 저 노래를 부를 땐 정말 그랬어요. 곁에 없더라고요. 내가 떠나보낸 게 아니고, 내가 떠나온 게 아닌데.


삶이 그렇더라.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의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


................


형도 집에서 막내지요?


그래, 자라면서 누이를 잃었다.


저도요. 저도 막내인데, 형이 군에 있을 때 돌아가셨어요. 그거 때문에 저는 평생 이등병이에요.

어쨌든, 형의 시에서 또 다른 제가 느껴지는 건 비슷한 인생의 상흔이 있어서인가 봐요.


뭘, 인마. 둘 다 날 때부터 비통을 안고 태어난 거야. 그 뿐이야.

그래서 사람들이 울적하면 네 노래를 듣고 비가 오면 내 시를 읽고.

그런가요. 비통. 요즘 시대와 안 어울리는 단어이지 싶네요.

요즘 시대 사람들을 보면 자기 생각과 사회에 대해 참 잘 표현해요. 우리는 그러면 안 되는 시대였어요.


시대. 그렇지. 시대. 나도 시대를 시로 썼으니.

장례식이 많은 시대였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노래는, 활자와는 다른 힘이 있어. 네가 부르니 더 그렇다.


............


............


형. 비가 그쳤네요.


그렇네.


형보다 고작 2,3년 더 살아봐서 뭐라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지금 사람들 보면 그래요.

시대는 달라도 정서는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그들 속에 계속 살아있는 건가 봐요.


오늘처럼 비가 오고 누군가 우리 시와 노래 속에서 비 속에 담긴 그것을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계속 살아있는 거겠지. 봄날은 가도, 우리는 살아있는 거겠지.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小邑(소읍)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宿醉(숙취)는 몇 장 紙錢(지전)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 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비가 오는 날은, 여지없이 김광석의 노래를 듣고 기형도의 시를 필사합니다.

20대의 많은 날을, 기타 치며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고 기형도 시인의 시집을 머리맡에 두고 잠이 들던 동생을 떠올리며 썼습니다.


김광석 노래 순서대로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서른 즈음에', '부치지 않은 편지(정호승 시인)'

기형도 시인의 시 순서대로 '빈 집', '질투는 나의 힘', '오래된 書籍', '입 속의 검은 잎', '봄날은 간다'



저작권 문제 될 시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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