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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나비 May 31. 2024

23. 결심

알바_자멸로 이끄는

지난 며칠간 남자의 생활은 대단히 풍족했다.

사실 풍족했다기보다는 방탕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지만..


파스타 면과 소스는 종류별로 잔뜩 사다 두었고,

빨간 뚜껑의 원통형 우유도 냉장고에 가득 채웠다.

하루에 한 통 이상을 비우는 남자에게 우유의

길지 않은 유통기한은 전혀 의미가 없었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미국산이나 호주산 소고기가

있던 자리는 값비싼 한우가 대체했고, 1만 원 이하의

싸구려 와인 몇 병만이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와인 냉장고에는 10만 원이 훌쩍 넘는

고가의 와인들로 자리의 주인들이 바뀌었다.



쪼로록


검붉은 액체가 투명한 와인잔에 담긴다.

남자는 잔을 들고일어나 거실 창 앞에 섰다.

서향의 거실엔 붉은 해가 길게 드리워졌다.


조금만 바라봐도 그렇게 눈이 부시고,

조금만 눈이 부셔도 그렇게 짜증이 나던

서향의 거실이 이젠 신기하게도

전혀 눈이 부시지도, 짜증이 나지도 않았다.


손목을 이용해 와인잔을 천천히 몇 바퀴를 돌리고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싸구려 와인과 달리 깊은 향과 복잡한 맛이

남자의 코와 입을 가득 채웠다.


거실 테이블 위엔 잘 구워진 스테이크와

오일 파스타 한 접시가 놓여있다.

옆에 놓인 와인병은 2/3쯤 비어있었지만

접시 위의 음식들은 거의 손을 대지 않은 그대로다.




와인잔이 비었다.

빈 와인잔을 채우려 와인병을 든다.

와인병이 비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와인 냉장고가 있는 방으로 향한다.

거대한 와인 냉장고의 문을 열고 새 와인병을

꺼내든 남자가 잠시 셀러를 훑어본다.

거대한 셀러 안에도 이제 와인은 거의 없다.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꺼낸 와인을 다시 셀러에

집어넣고 집을 나섰다.





- 114만 8천 원입니다.


남자가 재킷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며칠 전 첫 컨설팅 업무에 대한 대가로

인사팀장에게 받은 그 봉투 그대로다.

한 장, 한 장 지폐를 센다.

빳빳한 신권의 감촉이 손가락 끝을 통해 전해진다.


5만 원권 23장.

적지 않은 현금을 받아 든 와인 전문점의 계산원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 현금 영수증 해드릴까요?


남자가 살짝 고개를 가로 짓고는,

봉투에 담긴 3병의 와인을 들고 가게를 나선다.

그런 남자를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중년의 계산원이 고개를 좌우로 돌려 주변을 슬쩍

살펴본다. 자기 쪽을 신경 쓰는 이가 없는 것을

확인한 계산원의 손가락이 계산대 기기로 향한다.


010...




집으로 돌아와 봉투에 남은 돈을 계산해 본다.

사실 방금 전 가게에서 봉투를 꺼내면서

남은 지폐가 몇 장 되지 않음을 이미 확인한 남자다.


컨설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날 밤,

봉투를 열어 금액을 확인한 남자는 얼른 이 돈을

다 써버리고 싶었다. 비싼 한우를 사고 십만 원이

넘는 와인을 박스로 사고도 봉투 속의 돈은 절반도

채 줄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눈을 뜨면 와인을 마셨고

취하면 잠을 잤다. 심지어 꿈도 꾸지 않았다.


처음 마셔 본 이십만 원, 삼십만 원짜리 와인이

익숙해져 갔고, 비싼 한우도 먹는 양보다 남기고

버리는 양이 더 많아졌다.

남자는 점점 이 생활에 중독되어 가는 자신을

느꼈지만, 이상하게 아무런 걱정이 되지 않았다.


남자는 그제야  첫 컨설팅이 끝났을 때

이미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 일을 계속하리라 결정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왼손을 이마로 가져가 엄지손가락과 중지손가락을

넓게 벌려 이마의 양끝을 지그시 눌렀다.

동시에 오른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와인병을 집어 들었다.


와인병이 그대로 입으로 향한다.

남자의 목젖이 요동친다.

검붉은 한 줄기가 남자의 오른 입술에서 턱으로,

거실바닥으로 흘러내린다.


병에서 입을 뗀 남자는 입 주변을 닦지도 않고

바닥에 떨어진 검붉은 액체를 무심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뚝 뚝


닦지 않은 턱에선 검붉은 액체가 아직도 한 방울씩

거실 바닥으로 자유낙하 중이다.


거실 바닥과 부딪히며 바닥에 엉겨 붙은 검붉은

액체가 마치 자신이 흘린 핏방울처럼 느껴졌다.

신경질적으로 슬리퍼를 신은 발로 바닥을 비벼댄다.


- 하아…


짧은 한숨이 끝나고

남자의 손이 다시 와인병을 향했다.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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