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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나비 Jun 03. 2024

24. 등급

알바_자멸로 끝나는

- 잘 결정하셨습니다.

저번 컨설팅에서 보여준 능력이라면

충분히 좋은 성과 내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일정 정리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첫 컨설팅이 끝나고 딱 일주일이 지난 오늘,

남자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은 인사팀장의 얼굴이

어두워 보였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물론, 이렇게 되리라 짐작하고 있었지만

막상 남자의 입으로 직접 듣게 되자

착잡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표실의 문을 들어서자마자 인사팀장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이진경 대표가 한 손을 들어 휘휘 내저었다.


- 너무 격식을 차리네요. 요즘.

좀 적당히 하셔도 좋을 텐데..


자신의 말에도 일절 반응하지 않고

그저 숙인 허리를 편채 가만히 서있는 인사팀장을

보며 결국 이진경 대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 무슨 일인가요? 박. 무. 한. 인. 사. 팀. 장. 님.


이름부터 직책까지 한 음절 단위로 강세를 주며

불편한 심기를 여실히 드러내보는 이진경 대표지만,

그럼에도 표정하나 변함없는 인사팀장이었다.

잠시 그렇게 무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시선을 피했다.

이진경 대표는 왼쪽으로, 인사팀장은 아래로.


바로 고개를 든 인사팀장이 입을 열었다.


- 16호, 연락이 왔습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고 한바탕 욕이라도 퍼부을까

고민 중이던 이진경 대표가 인사팀장의 저 말을

듣고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 뭐, 예상대로네요. 수고하셨어요.

서칭부터 매칭까지 인사팀장님이 아니었으면

이번엔 애를 좀 먹을뻔했는데..

위에는 제가 잘 말씀드려 놓을 테니,

고과는 걱정하지 마시고요.


- …네. 감사합니다.


- 더 할 말은 없으시고요?


그렇게 고과를 받은들 뭐가 달라지는 거냐고

인사팀장은 되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말없이 눈빛으로만 그 생각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이진경 대표는 인사팀장이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다시 한번 오른손을 들어 휘휘 내저었다.


- 없으시면 그만 나가보세요.


이진경 대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인사팀장이

허리를 구십도로 숙였다.


일초,

이초,

삼초.


정확히 삼초 후,

인사팀장은 숙였던 허리를 펴고 천천히 뒤를 돌아

벽의 중간쯤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약한 진동음이 들리며 문이 열렸다.

곧바로 방을 나서는 인사팀장의 뒷모습이 컴컴한

복도 끝으로 사라지자 이진경 대표의 고개가

책상 위로 떨어졌다.


- 아니야, 후회하지 않아..


고개를 숙인 채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던

이진경 대표는 이내 고개를 들고 머리를 세차게

한 번 흔들었다.


책상 위에 있는 노트북을 열고

후보리스트 폴더에서 파일 하나를 선택해서

그 파일을 다시 컨설턴트 폴더로 옮겼다.

그대로 노트북을 덮으려던 이진경 대표가

뭔가 다른 생각이 떠올랐는지 방금 옮긴 파일을

더블클릭했다.


순식간에 남자의 프로필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정장을 입고 있는 남자의 정면과 측면 사진이다.

눈빛과 표정이 전문 모델처럼 자연스러운 걸 보면

촬영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앉아 있는 모습, 서 있는 모습, 대화를 나누는 모습..

지난번 사무실에 왔던 남자의 모습들이다.


가늘고 긴 손가락이 스크롤을 아래로 내렸다.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에 추레한 몰골로

아파트 앞에 나와있는 남자의 사진이다.

멍한 표정으로 화단 앞에 쭈그려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도 보이고, 고개를 숙인 채 마트 장바구니를

들고 걷는 남자의 모습도 보인다.

수 십장의 사진이 주루룩 화면 위로 사라진다.


주소, 주민번호, 연락처..

남자의 개인 정보가 담긴 표가 나오자 빠르게

올라가던 화면이 속도가 줄어들었다.


가족사항란 전체가 빨간색으로 두 줄이 그어져 있다.

비고란에 빼곡하게 내용이 채워져 있었지만

금세 화면 위로 사라졌다.


드디어 화면이 멈췄다.

멈춘 화면 안에서 가늘고 긴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커서가 따라 움직인다.

화면의 중간쯤에서 커서가 멈췄다.


*등급(확정):_______


커서가 멈춘 곳의 칸은 비어있었다.

커서가 다시 그 옆으로 조금 움직였다.


*등급(추천): B(박무한)


- 역시…


손가락이 위에서 아래로 빠르게 한 번 움직였다.

마우스 커서가 사라지고 칸 안에서 입력커서가

깜빡인다.

이번엔 손가락이 키보드의 백스페이스키로 향했다.

손가락이 키보드를 한 번 누를 때마다 괄호부터

한 글자씩 지워지기 시작했다.


*등급(추천):


기존 글자들이 깨끗이 지워지자 이번엔 두 손이

노트북 키보드 위를 덮는다.

양손의 손가락이 피아노를 연주하듯 리듬감 있게

움직인다. 그렇게 지워진 칸이 다시 채워지자

파일을 저장한 이진경 대표가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명하나 없는 컴컴한 방,

갑자기 방의 한 구석에 불이 들어오며 사람의

형상이 드러났다.

조명인 줄 알았던 불빛은 모니터 화면이었다.

오래된 고가구 느낌의 앉은뱅이책상 위에

책상만큼은 아니겠으나 마찬가지로 아주 오래된

배불뚝이 모니터가 한 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양반다리를 한,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짐작도 못할 만큼

주름이 깊었지만 부드러운 낯빛은

보는 사람에게 마음의 안정을 느끼게 해 주었고,

기품 있는 얼굴은 존경심을 블러 일으켰다.


손때가 시커멓게 탄 구형 마우스를 왼손에 쥐고

가운데 휠을 천천히 돌리며 화면을 보고 있던

노인이 휠을 멈추었다.


*등급(추천): S(이진경)


- 옳지! 이번엔 제대로 물어왔구나!

이놈의 영감탱이들 이젠 찍소리 못하겠지 클클클

이 보약을 어떻게 나눠줄꺼나~


노인을 처음 본 사람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으리라.

인자함과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던 외모와 달리

노인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천박하기

그지없었고, 말의 내용 또한 목소리가 주는

천박함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노인이 왼손의 검지 손가락을 펴서 키보드 위로

가져갔다.


*등급(확정):_______


노인의 손가락이 키보드의 한 곳을 누르자

빈칸에 알파벳 한 자가 생겨났다.


*등급(확정): S


이상한 일이었다.

그저 모니터상에 알파벳 한 글자가 타이핑된 것

뿐이었는데, 알파벳 주변으로 미세하게 잉크가

번져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의 얼굴에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문신이 새겨진 것 같이.


다시 마우스를 천천히 움직인 노인이

화면의 한 곳에 이르러 마우스 버튼을 딸깍거렸다.

그러자 모니터 화면 가장 아래,

[프로젝트 진행]이라고 적혀있는 버튼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모니터가 꺼지고 방은 다시 컴컴한

어둠으로 돌아갔다. 어둠속에서 노인의 천박한

웃음이 한 번 더 들려왔다.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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