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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나비 Jul 05. 2024

27. 자멸의 조짐(2)

알바_자멸로 이끄는

밤의 색이 짙어질수록 체내 알코올 농도는 진해졌고

체내 알코올 농도가 진해질수록 언행은 점점

퇴화되어 갔다.


- 야! 근데 이렇게 비싼 와인을 막 마셔도 되는 거야?


- 재승아 재승아! 너 왜 또 초치고 그래.

좀 전에 못 들었어? 마음껏 먹으래잖아!

그리고 엄연히 오늘 이 자리는 우리가 하해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아량을 베푸는 자리거늘!

이 정도 술은 당연히 얻어먹을 자격이 있지!

자, 그런 의미에서 다들 잔 들고 건배!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현민이 커다란 와인잔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원샷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미 취할 대로 취한 주인의 뇌에서 내려진

이 원샷 명령은 잔을 들고 있어야 할 손과

그 잔에 든 내용물을 마셔야 할 입에게는

잘 전달이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흐느적거리며 잔에 담긴 값비싼 와인 거의 반을

흘려버리는 현민을 보며 역시나 이미 눈이 풀린

재승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연신 혀를 찼다.


- 야! 지금 네가 흘린 양이 아무리 못해도

오만 원어치는 될 거다 쯧쯧. 세 살 때 뗀 턱받이나

다시 차고 와라 에잉 쯧쯧.


- 뭐? 지가 사는 것도 아니면서 찌질하기는.

그렇게 아까우면 흘린 와인값 오만 원은

계산 잘하시는 분이 내세요.


- 뭐? 찌질? 이번 기회에 아주 밥도 턱받이 하고

먹게 해 줘?


- 흥! 웃기고 있네. 우리 중에 팔씨름도 제일 꼴찌인

솜주먹 주제에.


계속해서 이와 유사한 조잡스러운 대화가 계속

이어졌고 당연히 이들의 대화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둘이 싸우거나 말거나 앞에 놓인 와인병만 바라보며

홀짝홀짝 얌전히 잔을 비우는 미영… 의 눈이 급격히

커지며 곧이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작은 와인바

안을 가득 채웠다.

티격태격 테이블 위에서 투닥거리던 현민과 재승이

결국 미영의 와인잔을 건드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비명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바닥으로 쓰러지기 직전의 와인잔 스템을

아슬아슬하게 잡아채는 데 성공한 미영이었고

그런 미영을 바라보고 있던 몇몇 테이블에선

환호가 들려왔다.  



공평하고 사이좋게 등짝 한 대 씩을 맞고 나서도


네가 밀어서 이렇게 됐네,

내가 참아서 그나마 이 정도네,

그러게 왜 칠칠맞지 못하게 술을 흘리고 다니냐,

찌질하게 남의 실수나 잡고 늘어지기냐…


좋은 주먹을 두고 굳이 입으로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미영이 다시 한 번 싸늘한 눈빛을

날렸다.

그제야 둘은 서로 고개를 반대방향으로 돌리고

조용히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일단의 소란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던 현주가

남자를 향해 잔을 내밀었다.


- 일, 새로 시작한 거야? 조건이 꽤 괜찮나 봐?

덕분에 우리 입이 호강한다 야.


슬쩍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자신이 내민 잔을

채우는 남자를 바라보며 현주가 다시 말을 꺼냈다.


- 왜? 또 말도 안 해주고 넘어가려고?

무슨 일인데? 회사는 어디야?

아, 명함 있으면 한 장 줘봐.


좀 전까지 잔을 내밀고 있던 오른손 대신

이번엔 왼손 빈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

빤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보며

결국 마지못해 남자가 입을 열었다.


- 컨설팅 쪽인데... 명함은 아직..안 나왔어.

시작한지 얼마 안 됐거든.

너네가 알만한 유명한 곳은 아니고..

그냥 나름 조건이 나쁘지않더라고.

좀 더 있어보고 확실해지면 그때 말해줄게.

아직은 나도 일한 지 얼마 안 돼서..


- 흠.. 일단 오케이.

암튼 요즘 같은 불경기에 고소득 직장을 바로

잡으신 우리 능력자님 대단해, 아주 칭찬해.


- 능력자는 무슨..


괜히 겸연쩍어 잔을 들어 와인을 빙빙 돌리는

남자를 보며 현주 역시 자신의 잔을 들었다.


- 다시 이렇게 보니까 얼마나 좋아!

이제 연락 좀 하고, 종종 보자.

이렇게 비싼 와인 자주 좀 먹어보게!


현주의 너스레에 남자도 결국 마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잔이 챙 하고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이끌린 나머지 세 명의 잔이 곧바로

두 개의 잔 옆에 붙었다.


다섯 개의 잔이 부딪히며 맑고 경쾌한 소리가

테이블 위로 흐르듯 스쳐간다.


- 야 임마! 이게 얼마짜린데 또 다 흘리고 지랄이야.

야 너는 그냥 맥주나 마셔! 아니다 넌 맥주도 아깝다.

여기 생수 큰 걸로 한 잔 갖다 주세요!


- 어쭈! 안 내놔? 내 잔 내놔 이 잔 도둑놈아!

미영아! 봤지? 빨리 경찰서에 신고해!

여기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잔을 훔쳐가는

도둑놈이 있다고!


다시 시작되는 현민과 재승의 투닥거림에 미영이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떻게 둘 다 진짜 두 눈 한 번 시퍼렇게 만들어줘?


시선을 두 사람에게 고정한 채 미영이 커다란

손바닥을 활짝 펴자 현민과 재승의 등이

자동으로 움츠려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미영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커다랗게 펼친 손바닥을 접어 앞에 놓인 와인잔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그렇게 미영이 우아하게 와인을 한 모금 마시자

잠시 시간이 멈춘듯했던 술집 안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밤의 색은 더욱 짙어져 갔고

밤의 색이 짙어질수록

체내 알코올 농도는 진해져 갔고

체내 알코올 농도가 진해질수록

남자의 표정은 굳어져갔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었다.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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