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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나비 Jul 12. 2024

28. 자멸의 조짐(3)

알바_자멸로 이끄는

처음의 반가움과 설렘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한 잔, 두 잔..

술잔 몇 번을 부딪히며 정점을 찍더니

비워지는 술병만큼이나 빠르게 남자의 마음에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마시지 않고 들고만 있던 와인잔을

입으로 가져가 크게 한 모금을 삼키고

남자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았다.

그쪽엔 여전히 재승과 현민이 투닥거리고 있었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현주와 미영이 보인다.

요즘 피부가 말이 아니라는 둥,

너 정도면 괜찮은 편이라는 둥,

어느 병원의 어떤 시술이 괜찮다는 둥의

이야기들이 남자의 귀에 들려왔다.


남자는 지금이라도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저기 앞에 보이는 출입문을 박차고 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을 해보았다.  


친구들의 이야기들은,

너무 시시했다.


너무 시시하고,

너무 따분한 이야기들이었다.

너무 무난하고,

너무 가벼운 이야기들이었다.


남자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재벌 회장들과 정치인들에게

욕을 하고 호통을 치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가더니

이윽고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창백하게 무표정으로 굳어져 있던 남자의 얼굴에

붉은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남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여전히 무표정하게 보일 정도로

남자의 표정은 아주 희미하고 미세하게 바뀌어갔다.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이 발이 되도록 빌던 재벌 회장들과

제발 살려달라며 울먹이던 정치인들을 떠올리자

남자의 한쪽 입꼬리가 아주 조금 더 위로 올라갔다.


아주 미세하게 변한 남자의 표정에 담긴 의미들은,

경멸과 비웃음이었다.


그리고,

환희와 절정이었다.




- 야, 너도 이제 술이 오르나 보다!

웬일이야 얼굴이 다 빨개지고.


갑작스레 옆에서 들려오는 현주의 말에

남자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머릿속 장면들이 모조리 날아가는 아쉬움에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남자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고

다시 잔을 들어 잔에 남아있던 와인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변한 건 없었다.

여전히 현민과 재승은 별 시답잖은 농담으로

투닥거리고 있었고,

현주와 미영의 주제는 이번 달 월급 이야기와

다음번 보너스 이야기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시시하고 따분했다.

친구들의 이야기가 보다 일상적인 이야기로

흘러갈수록 남자의 얼굴은 일그러져갔고

어느 순간 더 이상 참지 못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현주야, 나 아무래도 먼저 일어서야겠다.


서로의 팔을 잡고 티격태격하고 있는

현민과 재승,

거의 반쯤 감긴 눈으로  한 손으론 턱을 괴고,

다른 한 손으론 와인잔을 빙빙 돌리고 있는 미영을

잠시 바라보던 남자가 재빨리 다시 말을 이었다.


- 여긴 내가 계산했으니까, 천천히 마시고들 가.


말을 마치자마자 남자는 현주가 미처 잡을 겨를도

없이 빠르게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순식간에 문을 열고 사라지는 남자를 보며

현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자의 모습이 문 뒤로 사라지고

손잡이 바로 옆에 'push'라고 적혀있는 출입문이

대여섯 번쯤 앞뒤로 흔들리다 멈추자

그제야 현주는 입을 열었다.


- 아니, 뭐야 저 자식..
그나저나 저 자식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 얼굴이..

에휴 나도 취했나 보다...


뒤로 돌아서기 직전 언뜻 보았던 남자의 얼굴이

너무나도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건 술에 취한 자신이 잘못 본 것이리라.



집 앞까지 가지 못하고 근처에서 택시를 세운

남자가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택시기사에게

던지듯 건네고 차에서 내렸다.


도무지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남자는 전속력으로 눈앞에 보이는 아파트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바로 눈앞에 보여 뛰면 금방일 것 같던 아파트는

막상 뛰어보니 꽤나 멀었다.


아파트 공동현관을 지나자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멈추지 않고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마침내 집 앞 현관문 앞에 도착하자 남자는

현관문을 부여잡고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거실 소파에 걸터앉아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천장을 바라보며 아직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소파에서 일어난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잠시 뒤,

현관 옆 작은 방에서 나온 남자의 손에는

근사한 유럽 고택이 라벨에 그려진

와인 한 병이 들려 있었다.



검붉은 액체가 남자의 목젖을 거쳐가자

한밤의 조용한 거실에 너무도 또렷하게

그 소리가 울렸다.


꿀꺽

꿀꺽

꿀꺽


서향으로 치우친,

아주 약간 남향인 거실 창에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

고개를 들어 병째 와인을 때려 붓는 남자의 모습이

커다란 거실 창에 아른거렸다.


흐릿하게 번져 보이는 거실 유리창에

세세한 표정까지 보일리가 없건만,

이상하게 남자의 표정이 아주 또렷하게 보였다.


남자의 표정은..


아주 사납고

또 아주 탐욕스러웠으며

잔뜩 일그러져있었다.


그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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