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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나비 Jul 19. 2024

29. 자멸의 조짐(4)

알바_자멸로 이끄는

컨설팅을 마친 남자가 건물에서 나왔다.

잠시 후 건물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앞으로

흰색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차에 올라탄 남자는 많이 피곤했는지

차가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곧바로 잠이 들었다.



자신의 어깨를 흔드는 누군가의 손길에

남자는 잠에서 깨어났다.


- 손님, 손님!

다 왔어요! 이제 일어나세요!

아이고, 일이 많이 힘든가 보네.

젊은 양반이 이렇게 세상모르게 곯아떨어진 걸 보면..


정신을 차린 남자는 택시 기사의 얼굴과 택시 안을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자신이 차 안에서

깜빡 잠이 들었음을 깨달았다.

황급히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지폐를 꺼낸 남자가

기사에게 돈을 건네고는 차에서 내렸다.

거스름돈을 챙기던 기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 말 없이 내린 남자가

그대로 차 문을 닫는 것이 아닌가.


- 잘 생긴 양반이 인심도 후하구만 그래.

거 인상이 좀 사나운 게 흠이지만..

역시 사람은 인상만 보고 파악하기 힘든 법이여.

그나저나 꽁돈도 벌었겠다,

일찍 정리하고 종팔이놈 불러서

소주나 한 잔 할까나.


택시 기사는 뜻밖의 횡재에 연신 휘파람을 불어대며

차를 출발시켰고,

이윽고 아파트 앞에 남자를 내려준 택시는

기사의 유쾌한 휘파람 소리와 함께 아파트 밖으로

사라졌다.    



피곤함에 묵직한 목을 아래위로,

또 좌우로 돌리며 남자는 아파트 공동현관을 향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남자가 막 공동현관 앞 네댓 칸의 계단 중

첫 번째 계단에 발을 올리려던 순간

공동현관의 자동문이 열리며

중년의 여자가 튀어나왔다.


- 아휴! 이게 누구야!

요즘엔 통 볼 새가 없더니!

어쩐지 내가 지금 딱 나오고 싶더라니 호호호.

오늘은 일이 일찍 끝났나 봐?

아무리 봐도 이 정장이 참 잘 어울려!

마침 잘됐네. 안 그래도 내가 이것 때문에

집에 한 번 올라가려고 했는데

이게 뭐냐면 그 이번에 우리 아파트에서

주차차단기 추가 문제로 주민투표를 받고 있는데,

이걸 왜 추가로 설치하냐 하면, 저번에..


오른쪽 발을 첫 계단에 올리고

나머지 왼쪽 발을 그다음 계단으로 올리려던 남자는

갑자기 등장한 통장 아주머니로부터

쉴 새 없이 말이 들려오기 시작하자

결국 나머지 왼쪽 발을 그다음 계단이 아닌

처음 올린 오른쪽 발이 있는 계단으로 내려

자세를 바로 잡았다.


- 하아...

아주머니, 제가 오늘 좀.. 많이 피곤해서요.

지금 그 얘기하신 관련 서류는

그냥 저희 집 우편함에 넣어주세요.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 아니 뭐야!

그냥 지금 설명 듣고 받아가면..


한쪽 어깨에 둘러맨 낡은 꽃무늬 천가방에서

막 서류를 꺼내려던 통장 아주머니는

처음으로 자신의 말을 끊는 남자에게 놀라

자신도 모르게 살짝 짜증을 내었다.


하지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하던

통장 아주머니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순간적으로

몸이 얼어붙은 듯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바짝 얼어붙은 통장 아주머니를 지나친 남자가

열려 있는 공동현관문을 통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곧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남자의 모습은 사라졌다.



- 허억 허억..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남자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제야 통장아주머니는 숨을 헐떡이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한쪽 어깨에 맨 가방을 대충 추스르고는

남자가 올라온 공동 현관 앞 계단을 내려가며

여자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어째 사람 눈빛이 저래...

아이고 놀래라.

거참 이상하네.

잘생긴 것도 잘생긴 거지만

인상이 그렇게 선한 사람이었는데..

아이고 다 베려부렸네.

... 새로 들어간 회사가 많이 힘든가..

이놈의 스트레스! 만병의 근원이라드만..

그 인상 좋던 얼굴을 어찌 저 사단을 만들어놨을까 그래..



위이잉 위이잉


옷도 갈아입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상의 안쪽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 아, 네 상무님.


- 그래 잘 지내고 있지?


- 아, 네 저야 뭐..


- 일전에 전화 줘서 어찌나 반갑던지 말이야.

내일 회사 앞으로 와. 내가 한 잔 살 테니까.


- 아, 네...


- 왜? 시간이 안되나?


남자는 순간 시간이 안된다고 답을 할까 하다

이내 고개를 털었다.


- 아닙니다. 상무님.

시간.. 괜찮습니다.

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거기로 바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남자가 전화기를 소파 구석에다

던지고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 내 시간이 되는지를 먼저 물어봐야지..

지가 시간이 된다고 나오라고 하면,

내가 바로 나가야 돼? 씨발...


일전에 본인이 먼저 전화를 건 사실은

까맣게 잊은 걸까.


- 네, 상무님. 그간 연락 못 드려 죄송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네,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다시 일을 시작할까 하고 있습니다.

네, 컨설팅 쪽인데...

아닙니다. 다 상무님 덕분입니다.

주니어 때부터 상무님께서 멘토로 잘 이끌어주신

덕분입니다.

네, 시간 되실 때 연락 주시면 언제든 나가겠습니다.

네네, 감사합니다.

네, 그럼 들어가십시오.


이때 나눈 대화는 남자의 머릿속에서

다 지워진 걸까.


 


원형의 테이블에 다섯 명의 노인들이 앉아있었다.

천장을 향한 간접 조명 몇 개 만이 방안을 밝히고

있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 얼굴의 굴곡 사이로

시커먼 그림자가 겹쳐 보여 무척이나 기괴해 보였다.


- 자 오늘 모인 이유는 다들 잘 아실 텐데..


방의 가장 안쪽에 앉아있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주름은 깊었지만 부드러운 낯빛에

기품이 서려있는 얼굴의 노인이었다.


- 기존 순서에 대해 말들이 너무 많아..

오늘 그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하는 자리올시다.

원래 순서대로라면 김 회장님이 다음 순번이고,

그다음이 이 의원님인데..

이게 순서가 잘못되었다고 양 회장님과 구 총장님이

항의를 하셨어. 쯧쯧.

아니 어린애들도 아니고 나이도 자실만큼 자시고

알만큼 아는 양반들이 이 무슨.. 에잉 쯧쯧.


외모와 달리 노인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시작부터 매우 불쾌하다는 듯 말을 이어가던 노인은

급기야 혀를 차며 말을 끝냈고,

조끼 앞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 주섬거리더니

나무 파이프를 꺼내 입에 물었다.


파이프를 물고 연기를 뱉느라 고개를 살짝 위로

쳐들자 노인의 얼굴이 보다 자세히 드러났다.

그 노인이었다.

어두운 방에서 낡은 컴퓨터로 남자의 등급을

최종 확정하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


- 아니, 양 회장님, 구 총장님.

이번 순서에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러십니까 그래.

저번에 양 회장님과 구 총장님이 컨설팅받으셨으니

이번엔 저하고 이 의원님 순으로 가는 게

맞지 않겠어요?


- 그래요. 김 회장님 말씀이 백 번 옳지요.

이제 국정감사도 있고 해서 스케줄 겨우 맞춰놨는데

이제 와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흠흠..


짙은 남색 양복 상의 사이로 불룩하게 튀어나온

배를 어루만지며 앉아있던 노인이 억울한 듯 말을

꺼내자,

자주색 투피스를 입고 진주 목걸이를 한

누가 봐도 참 곱게 나이가 들었구나 생각이 들 만큼

인상이 좋은 노년의 여자가 말을 보탰다.


곧이어 나머지 두 노인이

그때는 등급이 달랐지 않냐며,

등급이 다른 만큼 순서도 다시 정해야 된다고

화를 내며 큰 소리로 외쳤고

방안은 이내 네 명의 노인들이 고래고래 질러대는

고함 소리로 마치 시장 바닥을 방불케 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도 힘든 난장판 속에서

처음 말을 꺼낸,

회의의 주재자 노인은 파이프를 물고

연기만 뻐끔뻐끔 불어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있다간 오늘 안에 컨설팅 순번을

정하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노인이 물고 있던 파이프를 손에 들어

테이블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연달아 다섯 번을 내리쳤을 때야 비로소 네 명의

노인들이 주재자 노인을 바라보며

입을 닫기 시작했다.

다시 처음처럼 방안이 조용해지자

주재자 노인은 파이프를 입에 물고 천천히 연기를

허공으로 내뿜었다.


- 휴우... 이렇게들 난장을 벌어서야 어디..


하지만 노인은 자신의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갑자기 노인들이 앉아있던 방의 방문이 벌컥

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한

백발의 노인이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잔뜩 찌푸린 주재자 노인이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한 백발의 노인의 입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자, 다들 이번 순번은..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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