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나비 Apr 10. 2024

1. 잠에서 깬 남자

알바_자멸로 이끄는

-무…


탁하고 갈라진,

그래서 도저히 알아듣기 힘든 한 음절.


-무울…


여전히 탁하고 갈라졌지만

그럭저럭 알아들을 수 있는 한 단어.


소리의 근원지는 한 남자의 입이다.

꽤 오래 면도를 하지 않은 모양인지

덥수룩한 수염이 입주변을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다.


잔뜩 메말라 갈라진 입술 주변엔

원재료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음식찌꺼기들이

군데군데 눌어붙어 있다.


-물!!


남자의 입에서 세 번째로 나온 정확한 발음의

이전 두 번과 동일한 뜻을 가진 한 음절의 단어는

더 이상 탁하지도 갈라지지도 않았지만,

아쉽게도 앞의 두 번과 결과는 같다.


대화란 둘 이상의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남자는 모르는 걸까.


갑자기 침대 위가 수직으로 높아진다.

세 번의 시도에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남자가 몸을 일으킨 것이다.


-하아… 죽겠네 진짜..


눈도 뜨지 않은 채 상체를 일으킨 남자는

양 어깨와 허리에 힘을 줘 등을 활처럼 휘더니

이내 고개를 뒤로 젖힌다.

잠시 그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던 남자가

힘겹게 양눈꺼풀을 밀어 올린다.


그렇게 열을 셀 정도의,

남자에게는 찰나와 같이 짧지만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지루하게 긴

십여 초가량의 시간이 지났을까.

천천히 고개를 바로 세운 남자가

눈곱이 덕지덕지 붙은 두 눈을

양 손등으로 몇 번이고 문지른다.

비로소 방안의 모습이 남자의 눈에 들어온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빈 와인병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시선을 침대 맞은편 책상 위로 돌리니

말라비틀어진 음식 잔해가 담긴 접시가 보인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남자가 방의 나머지 부분을

빠르게 둘러본다.


-하아…


짧게 한 숨을 내 보낸 남자가

몸을 돌려 침대 아래로 두 다리를 내린다.

아래를 보지도 않고 발바닥으로 바닥을 몇 번 쓸자

침대 밑에 널브러져 있는 슬리퍼가 발에 걸린다.

뒤집어져있는 슬리퍼 한쪽을 용케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에 끼워 바로 세우더니

이내 두 짝을 모아 양 발에 걸친다.


껑충하게 올라가 발목이 훤히 드러나는,

물이 빠져 연한 먹색으로 보이는 트레이닝팬츠에

목이 늘어나고 색이 바래 누레진,

원래는 새하얬을 흰색 반팔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줄무늬 슬리퍼를 신고 방안에 우두커니 서있다.


180 중반은 되어 보이는 큰 키에 균형 잡힌 몸매,

팔과 다리에 붙은 적당히 보기 좋은 근육들.

그렇게 한참을 서서 바닥의 빈 와인병들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는

시선을 거두고 방문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방문 손잡이를 잡고 돌리려던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아래로 처박고는

머리를 양옆으로 세차게 흔든다.

잠시 후 이제 괜찮아졌는지 다시 고개를 든 남자가

잡고 있던 손잡이를 돌림과 동시에

몸 쪽으로 힘을 주어 당긴다.


정확히 문이 열리는 각도만큼

방안의 어둠이 빛의 속도로 사라진다.

순간적인 눈 부심에 남자는 다급히

오른손을 들어 눈을 가린다.


-씨발








*사진출처:pixabay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