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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나비 Apr 17. 2024

3. 남자에게 필요한 세 가지(2)

알바_자멸로 이끄는

플라스틱이 가득 담긴 커다란 종이백과

종이, 스티로폼 등 또 다른 재활용품들로

꽉 찬  대형마트 장바구니를

양손에 하나씩 나눠 든 남자가 현관문을 나와

아파트 분리수거장을 향한다.



-또 밤새 퍼마셨네. 그러다 몸 다 베려,

지금 젊으니까 잘 모르겠지?

나중에 골병들어 골병!  


- 아…네…


-뭐든 적당히가 좋아, 적당히.


-아…네…


-뭐 맨 말만 하면 ’아, 네‘ 야. 아휴 답답해!

저 그 뭐냐, 아파트 수선계획 동의서 받는 거

이번주까지니까 이따 저기 현관 입구 앞 투표함에

넣고 가.


-아…네…


-대답만 하지 말고!

저번처럼 까먹으면 내가 또 올라가서라도

받을 거니까 꼭 챙겨!


-아…네…


마침 분리수거를 하고 있던 아랫집 통장 아주머니가

걸어오는 남자를 보자마자

커다란 분리수거용 가방을 바닥에 내려두고

양손을 허리에 걸친 채 한바탕 퍼붓기 시작한다.  


아.. 조금만 더 있다 올걸..


뒤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이제 와서 뭐 어쩌랴.


그렇게 분리수거를 하는 내내,


그건 위에 뚜껑은 분리하고 넣어야지

이건 속까지 제대로 안 씻었네

거기 투명 플라스틱 넣는 곳이야

...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며

잠시도 쉬지 않고 남자의 분리수거를

진두지휘하는 통장 아주머니다.


갑자기 분리수거장에 적막이 흐른다.


종이류에 덮여있어 몰랐던,

남자의 대형마트 장바구니 바닥에 깔린

빈 와인병들을 보고 눈과 입이 두 배로 커지는

통장 아주머니다.


- 에?? 이게 다 몇 병이야! 하나 둘 셋..

하이고.. 병만 팔아도 금방 부자 되겠어 아주!


분리수거장 적막의 시간은 아주 짧았다.



오늘따라 유독 힘든 분리수거를 끝내고

아파트 1층 입구에 들어선 남자가

엘리베이터를 타지도 않고 바로 계단을 오른다.

혹시라도 엘리베이터에서

또 누군가를 만날지 몰라

아예 계단을 이용하는 것이다.

오늘의 외부인은 통장 아주머니 한 분으로 족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재활용품이 담겨있던 마트 쇼핑백을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소파에 몸을 던진다.


- 소파는 앉는 데지 눕는 데가 아니라고 했지!


또다시 남자의 머릿속을 관통하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남자는 급히 몸을 반대 방향으로 돌린다.

마치 그렇게 있으면 여자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을 것처럼

소파의 등받이에 얼굴을 파묻는 남자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깜빡 잠이 들었다 깨어난 남자가

소파 등받이에서 얼굴을 떼고

다시 몸을 반대 방향으로 돌린다.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한 남자가 소파에서 일어난다.


주방으로 걸어간 남자가

냄비에 정수기 물을 담는다.

정확히 500ml 물이 담긴 냄비를

인덕션의 오른쪽 화구에 올리고

화력을 최대로 올린다.


아래 서랍에서 소금을 꺼내 냄비에 약하게 한 번

툭 털어 집어넣고,

서랍 밑 수납장에서 파스타면을 꺼내

엄지와 검지를 말아

그 절반 정도가 채워질 정도만 덜어낸다.


꺼낸 파스타면 양끝을 잡고

잡은 두 손에 힘을 준다.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파스타면이 한 번에 반으로 부러진다.


- 봤으면 또 한 소리했겠네.

파스타면을 누가 이렇게 부러뜨려 먹냐고..


제법 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번엔 냉장고를 열어 뭔가를 꺼낸다.

흰색 스티로폼팩에 찢어진 랩으로 덮여있는,

그래서 랩이 소용이나 있을까 싶은,

원래 있어야 할 양의 절반쯤 남아있는 소고기다.


파스타를 삶는 냄비 옆

왼쪽 화구에 프라이팬을 올리고

올린 프라이팬이 채 예열되기도 전에

고기를 아무렇게나 올린다.

앞뒤로 몇 번 뒤집어 대충 핏기가 사라지자

왼쪽 화구의 불을 끄고 그대로 내버려 둔다.


파스타 면이 담긴 냄비를

집게로 한 번 휘저어 보더니,

오른쪽 화구의 불도 끄고 냄비에 남아있던 물을

싱크대에 절반쯤 따라버린다.


그대로 냄비를 싱크대에 놓아두고

냉장고에서 파스타 소스를 꺼낸다.

거의 남아있지 않은 토마토소스병의 뚜껑을 열고

냄비에 남은 물을 마저 다 붓는다.


인덕션 오른쪽 화구에 다시 불을 올리고

면이 담긴 냄비에

면수가 부어진 소스를 모조리 쏟아붓는다.


집게로 면과 소스를 몇 번 뒤적이던 남자가

싱크대 상단 수납장을 열어

아무 무늬가 없는 흰색의 접시를 꺼낸다.


인덕션의 불을 끄고 파스타를 접시에 옮겨 닮는다.

아직 프라이팬에 올려져 있는 소고기를

집게로 집어 파스타 위에 대충 올리고

싱크대 위에 놓여있던 후추통을 집어

한참을 갈아댄다.


파스타 위에 올려둔 고기의 윗부분이

갈려진 후추의 검은색으로 거의 다 덮여 갈 때쯤,

그제야 후추병의 그라인더를 돌리던

남자의 손이 멈춘다.


어느덧 해는 거의 지고 있었고

거의 완벽한 서향의 거실 바닥엔

약해진 햇빛이 마치 태양의 꼬리처럼

길게 걸쳐져 있다.


접시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남자가

뭔가 생각난 듯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현관 입구방으로 걸어간다.


현관 입구의 방문이 열리자

흐릿한 태양의 꼬리가 방 안으로 갈라져 들어가며

거대한 직육면체 형태의 실루엣이 드러난다.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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