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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짜는 진 Aug 08. 2020

배틀 아니고 베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이미지


공방 이름에 일부러 '베틀'이라는 단어를 넣었는데도 불구하고, 메신저로 베틀이나 베틀수업과 관련된 문의를 하는 사람들의 반 정도는 '베틀'을 '배틀'이라고 쓰는 걸 발견하곤 했었다.

그럴때면 '이 사람은 베틀이라는 단어도 모르나?'라는 생각보다는 '베틀'이 사람들의 일상 생활속에서 그만큼 멀어졌다는 뜻이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언젠가는 작업과 관련된 글을 쓰기 위해 '베짜기'의 띄어쓰기를 사전에 검색해본 일이 있는데, 그 결과를 보고 묘한 기분에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출처: 네이버 사전


당연히 '베'+'짜기' 이니 '베 짜기'가 옳은 띄어쓰기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베짜기'라고 붙여쓰는 게 옳았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언어의 영향을 받고, 언어는 반대로 일상생활에 영향을 받는다는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베짜기'가 띄어쓰기 없이 한 단어처럼 사용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일상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이 무리한 추측은 아닌 것이, 허난설현의 <규원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봄바람 가을 믈이 뵈오리 북 지나듯
(봄바람과 가을 물이 베 올이 북을 지나는 것처럼 빨리 지나간다.)


뿐만 아니라 <낭송 18세기 연행록> (김현미 풀어 읽음, 북드라망)에는 이런 표현도 나온다.


큰 길의 너비는 80~90보이며, 가장 좁은 호동도 수레 두 대가 나란이 지날 만하다고 한다. 그 길이 작지만 구불구불하지 않으며, 막힌 곳도 없었다. 길마다 이어져 서로 통하게 되어 있으니 마치 '우물 정井'자의 획과 같으며, 베틀 위의 실들 같았다.
- 이기지, 『일암연기』1720년 9월 18일


무엇인가를 설명하려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할 때에는 누가 들어도 알만한 것을 가져다 쓰게 되니, 그 당시에는 '베틀'도 '날실'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겠구나 싶다. 지금은 반대로 '베틀'과 '날실'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해야 할 테지만.


이렇게 베틀이 사람들에게 낯설게 느껴지다보니 베짜기를 배워 그것을 업으로 삼는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잘못된 표현은 종종 눈에 띈다. '베틀기, 직조기' 등이 그 예이다.


출처: 네이버 사전

베틀은 말 그대로 '베를 짜는 틀'이라는 뜻으로, 그 자체로서 이미 완결된 단어이다. '베틀기'는 여기에 '-기機'를 붙인 것이다. 언어심리학적으로 한자어가 단어의 끝에 와야 완결된 느낌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데, '베틀기'도 그 예시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영어 단어인 '드라이dry'에 한자어 '-機'가 붙어 만들어진 '드라이기'처럼 '베틀기' 역시 어색한 조합의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직조기'라는 단어는 아주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나 뜻을 풀어보면 '직조를 하는 기계'라는 뜻이 된다. '직조기'라는 단어를 들을 때면, 마치 내가 기계처럼 일을 할 때 내가 나를 직조기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한자어로는 '직기'라고 쓰는 게 조금 더 일반적이다.


'베틀', '직기'도 이렇게 잘못 쓰이는데 베짜기의 과정을 일컫는 말들은 무사할 리 없다. '정경''전경'으로, '종광''종강'으로 쓰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정경整經'의 한자를 풀어보면 '경사(세로실)를 정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베를 짜기 전에 베틀에 올리기 위한 세로실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순우리말로는 '베날기'라고 한다. 순우리말로 '잉아'라고 하는 '종광綜絖' 베틀을 구성하는 것 중 하나로, 정경을 끝낸 세로실을 베틀에 올린 후 한 가닥씩 종광에 통과시켜야 한다. 베를 짜는 과정에서 손이나 발로 조작을 하면 세로실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때 세로실이 걸려있는 채로 위아래로 움직이는 부분이 '종광'이다.



누구나 알기 전에는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만, 최소한 베짜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옳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단어 사용이 베틀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베 짜기'가 아닌 '베짜기' 라는 단어를 무척이나 좋아하게 되었다. '베짜기'라고 쓰는 순간만큼은 베짜기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배틀'이 아니라 '베틀'이라고, '베틀기, 직조기'가 아니라 '베틀, 직기'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런 날이 올까? 어쨌거나 옳은 표현을 알리는 것부터가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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