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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짜는 진 Aug 15. 2020

베짜는 일이 직업이라고요?

대학시절, 나는 '전공이 뭐예요?' 라는 질문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것은 일종의 관심의 표현이며, 무례한 질문도 아니고, 질문을 받는 사람이 딱히 싫어할만한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으나, 어쨌든 나는 싫었다. 질문한 사람까지 미워지지는 않았고, 그냥 그 질문이 싫었을 뿐이다. 아마도 싫다기 보다는 곤란하다는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같거나 비슷한 전공을 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내가 뭘 공부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공이 뭐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매번 두루뭉술하게 '미대요.' 하고 대답하곤 했다.


"미대? 미대도 분야가 많잖아. 그 중에서 뭔데? 서양화? 동양화?"

미대생에 대한 과분한 관심을 내비치며 이렇게 질문을 하는 사람들(일부인 듯 표현하지만 사실상 거의 100%이다.) 에겐 거의 포기하듯 대답한다.

"섬유예술학과요."

여기에서 대화가 끝나면 좋으련만, 관심은 끝나지 않고 대화는 지속된다.


"옷 만들어요? 의류(의상)학과?"

"아뇨."

"아 그러면 패션디자인인가?"

"아뇨."

"그러면?"

"섬유예술학과요."


거봐요, 어차피 모르시잖아요,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오르지만 애써 내뱉지는 않는다.

섬유예술학과. 도대체 뭘 배우는 학과인가?

<없는 듯> 2012. 알지네이트 기법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012. 입체자수 기법 (부분) (왼)                     <있잖아,> 2012. 엮기 (오)


섬유예술학과에서는 옷을 만들지 않는다. 패션을 다루지도, 디자인을 익히지도 않는다. 가방이나 파우치 등, 섬유로 된 실용품을 만들려면 만들 수야 있겠지만 그것을 집중적으로 배우는 것도 아니다. '공예과'라는 이름의 학과를 가진 대학에서도 섬유를 다루는 수업이 개설되어있기는 하지만, '섬유예술학과'는 엄밀히 따지면 '공예'에 속하지 않는다. 섬유예술학과는 '섬유'를 가지고 '예술'을 배우는 전공이다. (이 글에서 굳이 섬유가 포괄하는 개념을 정의하거나, 예술과 공예와 디자인을 구분하는 기준을 다루지는 않겠다.)


미술관에 가면 많은 종류의 작품이 있다. 캔버스에 그림이 그려진 평면회화 작품도 있고, 전통적인 재료(흙, 브론즈 등)로 만들어진 조소 작품도 있고, 디지털 매체를 활용한 미디어 작품이나 다양한 재료를 혼합하여 만든 설치 작업 등이 그 예이다. 섬유예술학과에서는 섬유를 활용하여 그러한 '작품'을 만드는 것을 주된 목표로 한다.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대신에 천에 안료나 염료로 그림을 그리거나(염색) 실로 수를 놓는다(자수). 혹은 직물 자체에 패턴을 짜넣기도 한다(직조). 그러니까 섬유예술 작품은 평면 회화가 될 수도 있고, 입체의 설치 작업이 될 수도 있다. - 이런 이야기를 '전공이 뭐예요?' 라는 단순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쉽고 간단하게 담아내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베짜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되면서 이렇게 '곤란한' 질문은 모양새만 바꾸어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가 되었다. 이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매번 '아, 이걸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베틀이라고 아세요?"

"옛날에 할머니들 하시던 그거요?"

"네, 맞아요. 베짜는 일이 제 직업이에요."

"네? 베를 짜신다고요?"


이렇게 간단한 대화가 이어지고 나서 이어지는 질문은 거의 정해져있다.

"어쩌다 베짜는 일을 직업으로 갖게 되셨어요?"

답은 간단하다. "전공 살린건데요."

그러면 대화는 이 글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출처: 네이버 사전


이쯤 되면 내게 '그럼 직녀이신거네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내 직업을 칭하는 데에 '직녀'라는 단어 역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 내가 베짜는 '여성' 이어야만 하지?

회사원, 교수, 의사, 변호사... 세상에는 많은 직업이 있지만 누구도 '회사다니는 여성', '남을 가르치는 여성', '병을 고치는 여성'이라는 직업명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베짜는 사람에게 직업명을 허하라!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 라는 질문에 간단명료하게 답변할 수 있는 그런 직업명, 나도 가지고 싶다.

한동안 '직조공(織造工)'이라는 단어를 써보려 했지만 의미가 그다지 정확하지도 않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는 단어도 아니었다. 얼마 전 어딘가에 실린 '명징하게 직조된'이라는 표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베짜는 백수' 라고 부르기로 했다.

'일을 아주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딘가 놀고 먹는 사람'같은 느낌이 들어 꽤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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